'르포' 천여 년 전 고대 삼국시대 대당 교역항 당은포는 지금...-화성시는 문화재 보존과 관리에 신경 쓰고 있나 ?
1400여 년 전 초가을 어느날 당은포구,
당나라에서 당은포구로 큰 돛을 단 범선들이 들어왔다.
요즘 포구는 활기를 띠고 있다. 포구의 하역꾼들은 당나라로 부터 들어온 교역품들을 배에서 바쁘게 내리고 있다. 겨울의 강한 북서풍이 불기전에 당나라와의 교역품과 사람들은 서해바다를 건너가고 오는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서해의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아늑한 포구인 당은포(唐恩浦)는 당나라로 가는 사절인 견당사, 석가의 높은 뜻을 배우러 바다를 건너는 구법승, 공맹의 유학을 익히려는 유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다. 당은포는 <신당서>에 신라를 가는 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배를 타고 발해만 (현 허베이성 톈진)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의 남양만에 위치한 당은포구에 도착한 후, 육로를 이용하여 동남쪽으로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王城)인 경주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한반도의 당은포가 중국의 덩저우에 대응하는 서해의 중요한 교역항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교역의 형태는 사무역보다는 공무역 중심이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공무역은, 신라가 인삼 같은 특산물과 직물류 및 물품화폐의 성격을 지닌 금·은·동·포 등을 공물로 가져간 데 대해, 당나라는 외교적인 의례품과 아울러 직물류, 도자기,금속가공제품 및 문화 관련 물품을 사여하는 형식이었다.
특히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우리 인삼은 일찍부터 중국으로 수출되는 교역품이었다. 당시 인삼은 재배삼이 아니라, 산에서 심마니들이 채취하는 산삼이었다.
인삼은 교역의 이익이 컸던 제품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양나라에 대한 인삼 교역권을 빼앗을 정도였다. 고구려, 백제는 물론 신라에서도 인삼을 수출하였는데, 734년 당나라에 수출한 인삼의 양이 한 번에 200근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당 교역량이 적지 않을뿐 아니라 원효도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구법의 길을 떠날 때 배를 타려고 했던 곳이다. 인적교류도 빈번해 당은포에는 역관. 관공서 등이 설치되었고 그에 따른 주막 등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규모가 제법 큰 포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당은포에서 당나라로 출발한 학자와 승려가 200여명이 넘는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당은포는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한국지식산업연구원 황진하 박사는 2017년 경기도 화성시청의 ‘당성 고대포구 복원계획 수립 연구 중간보고회’에서 “고대포구로 은수포, 화량진포, 마산포가 유력한데 여러 요인을 따져보면 ‘은수포’ 지역이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된다”고 밝힌바 있다.
10월17일, 취재팀은 당은포로 비정된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일대를 답사해 봤다.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에서 당성로를 따라 서해바다 제부도 방면으로 3km남짓 ,야트막한 구릉을 1~2개 넘어가면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평야는 늦가을 황금빛의 농경지 들판과 바다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산업공단의 공장들 지붕이 밀집돼 난립해 있다.
당시 당은포가 위치해 있던 지역은 지난 87년에 착공해 94년에 준공한 시화지구 개발사업으로 육지가 되어 있다.
시흥군 군자면과 화성군 대부면(87년 당시 행정구역)의 12.6km를 연결해 830만평의 공단부지와 5300만평의 농지가 생겨난 반면 신라 진흥왕 이후 400년 동안 한반도의 고대 서해안 최대 교역항으로 번성을 누렸던 당은포의 흔적은 깡그리 지워져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산업단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시뻘겋게 녹슨 철골들을 쌓아놓은 철골구조물 조립공장들 , 산 만큼 쌓아놓은 유독물질을 포함한 건축폐기물, 쉴새없이 철골과 건축폐기물을 싣고 드나드는 대형 화물차들, 대형화물차외에는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진흙탕길,
1400년전 값나가는 교역품들을 싣고 수 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 자리에는 현재 건축물폐기물과 대형철골을 실은 화물차가 먼지와 흙탕물을 튀기며 지나 다니고 있다.
기자는 얻은것에 비해 잃은것이 더 많은게 아닐까... 개발당시 작은 규모라도 보존지구를 설정해 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그 지역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당은포구 위치에서 2km쯤 북서쪽으로 가다보면 조선 초기 경기도 지역 수군체계에서 핵심을 담당한 화량진성(기념물 제224호)이 나온다. 화량진은 신라시대 이래 서해안 지역의 교통. 군사적 요지였다.
15세기 전반 당시 경기도 지역 수군 군선 84척 중 50척을 관리하였고 경기수군병력 5700여명 중 3300명을 관리하는 수군사령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지역도 시화지구 개발사업으로 육지가 된 건 당은포와 마찬가지다.
성으로 올라가는 안내표지 하나 없는 숲길을 헤쳐 가며 진을 끼고 있는 해발 100여 m의 산 정상에 올랐다. 멀리 제부도와 서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정상 부근엔 이곳 저곳에 무너져 내린 성벽을 쌓았던 돌들이 흩어져 있다.
무너짐 방지를 위한 마포자루들이 그나마 남아 있는 성벽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당시 여러개의 진과 포를 관할하던 경기남부수군사령부의 위용은 찾아 보기 어렵다.
화성시의 화량진 정비계획은 있지만 본격적인 정비는 부지하세월이다. 정비는 고사하고라도 기본적인 관리조차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가관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동안 오도처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었지만 이번 학술발표회의 자료를 종합하면 마도면 백곡리 대형고분이 오도처라는 주장에 학계가 동조하는 상황이다.
남양반도를 중심으로 한 화성 서부지역은 역사적 유물과 스토리가 풍부하게 묻혀 있는 곳이다. 그런면에서 화성시는 축복을 받은 지역이다. 그러나 화성시는 이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과 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경남 고성군은 바닷가에 찍혀 있는 공룡발자국만으로도 지역을 홍보하고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화성시 송산면에는 발자국보다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공룡알 화석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화석이 된 공룡알을 여러개 볼 수 있다.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엄청난 호기심을 끄는 소재다. 화성시는 이런곳에 큰관심을 두고 수도권의 관광객을 불러 모아야 한다.
당은포 , 당성, 화량진성, 원효의 오도처, 공룡알 화석지 등 곳곳에 수 많은 유물과 유적, 생태환경이 산재되어 있는 역사문화의 도시가 바로 화성이다.
화성시는 수도권에 위치한 관계로 어떤면에서는 저절로 인구가 유입되고 공장이 들어오고 도시가 발전하는 추세다. 이젠 도시의 품격과 품위를 추구해야 한다. 도시의 품격과 품위는 문화에서 나온다.
화성 서부지역 주민들은 시장과 더불어 문화담당 공무원들의 역사인식과 관리 시스템도 달리 해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역사학자, 향토사학자, 역사문화연구단체 등을 위원으로 하는 화성역사발전위원회 같은 조직을 구성해 화성시의 역사문화발전을 꽃피우는 역할을 맡겨 보는것도 방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과 안일한 행정으로는 화성시 문화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내고장의 지나간 역사와 그 현장을 되살리는 길은 지역민과 지자체의 지적 호기심과 노력으로 화성시의 브랜드를 알리고 그 가치를 높힐 수 있을 것이다.
생태환경뉴스 Eco-Times / 홈페이지: eenews.kr -기획 : 금웅명 고문 -취재 : 박래양 기자 lypark97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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