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은 이를 핑계로 1910년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서거하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전 민족을 울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했으며, 이화학당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다.
당시 유관순 열사가 다니던 이화학당은 학생자치기구인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학술토론․사상토론․시국 토론은 물론 애국지사를 초청하여 시국 강연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오후 3시만 되면 조국 독립기원 기도회와 토론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다.
고종의 서거하자 이화학당 이문회에서는 2월 28일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소복으로 대한문(大漢門) 앞에 나가 망곡(望哭)할 것을 결의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히 수업을 중단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관순 열사도 5인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탑골공원의 만세운동과 3월 5일 남대문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10일 일제는 전국 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을 내리니, 유관순 열사도 고향 병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 열사는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습득한 독립선언서를 숙부인 중권과 조병옥 박사 부친인 조인원 등 교회 지도자들께 전달하였다. 그리고 은밀히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며, 틈틈이 지역 간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서 본 만세운동을 토대로 하여 만세운동 계획 전반에 대해 조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조인원이 장터 쌓아 놓았던 쌀가마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대도 전국적으로 경계령을 내려 만세운동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러므로 병천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도 준비하고 있다가 오후 2시에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날 병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수는 일본 헌병대 추산 3,000여 명이었으며,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순국자가 19명이나 되었다. ( 2편에 계속됩니다)
Eco- Times 박충순 전문위원 dksrhr2@naver.com (중국문학 박사. 전 유관순 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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