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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별기고]유관순 열사 이야기2

Eco-Times | 기사입력 2023/02/25 [08:53]

[3.1절 특별기고]유관순 열사 이야기2

Eco-Times | 입력 : 2023/02/25 [08:53]

  


유관순 열사는 4월 1일 병천 만세운동에서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일본 헌병은 총기를 발포하여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19분이 순국하였다. 이때 유관순 열사는 총기를 발포하는 일본 헌병에 달려들어 “내 나라를 찾겠다는데 왜 발포하느냐.”며 총기를 제어하였다. 그러나 이날 일본 헌병은 한 사람도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천안의 유치장에서 10여 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공주 감옥으로 이감되어 재판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받았고, 서울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어 2심 재판을 받아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받았다. 이때 많은 만세운동 참가자가 상고하였으나 유관순 열사는 “어딜 가면 감옥이 아니겠느냐!”며 상고를 포기하였다.

 

당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단심재판으로 사형한 것이 서구 열강의 지탄을 받게 되자 모든 독립운동 관련 재판은 형식적이나마 무조건 2심까지는 거치게 하였기 때문에 유관순 열사도 2심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병천 만세운동은 호서지방을 대표하는 운동이자,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가장 피해가 큰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병천 만세운동은 지령리교회라는 단위교회가 운동의 중심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상자가 나왔음에도 끝까지 비폭력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특성이 있다.

 

▲ 유관순 열사 (수감되어 있던 당시)  © Eco-Times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이던 유관순 열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세를 소리높여 외치곤 하여, 모진 고문을 받곤 하였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가 되자, 같은 방 수감자들과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선창으로 온 감옥의 수감자들은 물론, 담장 밖 행인들까지 동참하여 만세를 외치자 그 일대가 교통이 막히게 되었다. 이 일로 유관순 열사는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날 아침 유관순 열사는 “매 좀 맞으면 되겠지요!.”라며 결의를 다졌다.

 

1920년 3월 28일, 영친왕의 결혼을 기념하여 모든 수형자의 형기를 반감해 출옥시키는 특사가 있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반감된 형기도 채우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순국했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장인 웰터와 김현경(金賢卿) 선생과 오빠 우석 등이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화학당 동창생이며,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5년간 사용하였던 보각 스님(속명 이정수)은 “곧 관순이가 풀려난다고 해서 친구들이 한푼씩 모아 옷을 맞추고, 핀도 사고, 구두도 사고, 환영회를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얼마 있으면 나올 줄 알았는데 썩은 시체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밤새도록 우리가 운동장에서 울고 잠도 못 잤어요.”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金種宇)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유관순 열사는 만세운동 현장에서 부모님의 순국 모습을 보았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지령리 교회와 이화학당에서 형성된 사생관(死生觀)과 독립선언문의 공약 3장의 자유 정신을 끝까지 실천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자유 정신에 따라 배타적 감정을 배제고, 최후까지 질서를 존중하며, 광명정대하게 만세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정신은 바로 ‘자유․평등․평화’정신이라 하겠다.

 

 1937년 6월 9일자의 동아일보 기사에 ‘이태원을 주택지로 만들기 위해 1935년부터 1936년 4월 8일까지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을 추진하였다. 그중 유연고 묘가 4,778기이고, 무연고 묘는 28,000여 기이다. 경성부 위생과에서는 무연고 묘 그 전부를 망우리 공동묘지에 화장 및 합장하고, 1937년 6월 9일, 오후 2시부터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위령제를 거행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여러 차례 현지 방문과 방증 자료 조사를 통해 유관순 열사께서 이곳에 함께 계실 수 있다고 판단하여, 2018년 10월 망우리공원 ‘이태원무연분묘합장묘’ 옆에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다.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할 것을 의결하여 서훈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Eco-Times 박충순 전문위원 dksrhr2@naver.com  ( 중국문학 박사. 전 유관순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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