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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절 특별기고] 유관순 열사 이야기3

Eco-Times | 기사입력 2023/02/25 [08:59]

[ 3.1절 특별기고] 유관순 열사 이야기3

Eco-Times | 입력 : 2023/02/25 [08:59]

 

 



* ( 2002년 당시 99세의 유관순 열사 친구인 보각 스님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임 )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기숙사 한 방에서 5년을 같이 지낸 보각 스님(속명 이정수)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부지런하고, 뭘 하면 열심히 하고, 안 하면 딱 안 하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보각 스님이 3학년이었을 때 유관순 열사는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2학년 같은 반으로 편입학하였다.

 

당시 이화학당의 기숙사는 방이 38개였고, 300명이 살았으며, 전기도 들어왔고, 변소도 수세식이었다. 식당은 아래층에 있었고, 300명이 밥을 먹을 땐 큰상에다 같은 반 학생들끼리 앉아 먹었다. 빨래는 학생들이 하지 않고, 이름을 써서 내놓으면 세탁소에서 세탁하여 금요일 저녁에 가져왔다. 그러면 방에서 한 사람씩 가서 가져왔다. 당시의 교복은 회색 치마에 흰 저고리였다. 유관순 열사는 기숙사 3층에서 보각 스님, 유관순, 서명학, 유예도 등 8명이 함께 생활하였다.

 

▲ 이화학당 전경  © Eco-Times


하루는 유관순 열사와 보각 스님 둘이서 종이를 사다가 태극기를 그렸다. 기숙사 2층에서 밥그릇을 가지고 빨간 물 파란 물로 태극기를 그렸다. 그러나 괘를 몰라 아무렇게나 한 70장을 밤새도록 그렸다. 식당 아주머니한테 밀가루 좀 달래서 풀 쒀서 기숙사 38방과 학교 교실은 물론 서양 선교사 방에까지 다 붙였다.

 

다음 날 아침, 태극기를 붙였다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이 철모르는 애들이 만들었다며, 팔괘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유관순 열사와 사촌 언니 유예도는 고향에 돌아가 태극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이화학당 기숙사에서는 저녁에 자기 전에 기도 종을 치면 돌아가며 기도하였다. 한번은 유관순 열사 차례인데,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라는 말을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하여 모두 웃었다. 그날 보각 스님 어머니가 보내주신 명태 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그 명태가 생각나서 그랬다고 하여 또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 한 달 동안 기숙사 방에 벌점인 붉은 딱지를 붙였다.

 

매주 금요일 저녁, 모든 학생은 저녁을 먹고, 이문회로 모였다. 사회 나가서 활동할 준비를 하라고, 학생들의 복장은 매우 자유로웠으며, 강연도 듣고, 편을 나누어 토론도 하였다.

 

3월 5일 서울역 만세운동은 박희도 목사의 지휘로 남자들은 가장자리에 서고, 여자들은 가운데 4줄로 서서 붉은 줄을 매고, 서울역에서부터 독립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 종로까지 행진하였다. 기마 순사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종로 6가쯤 가다 유관순 열사가 체포되는 바람에 헤어졌다.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어떤 가게 주인이 불러 들여 물을 먹이고, ‘지금 나가지 마라. 지금 나가면 독립도 되기 전에 죽는다.’라고 하였다. 저녁때가 되면서 조용해지자 가게 주인이 정동 골목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기마 순사가 골목에 있어서 더 캄캄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학교로 들어갔다. 학교로 와 보니 죽은 사람도 있었고, 유관순 열사는 훈방이 되어 돌아왔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유관순 열사가 ‘애들아 이 차 소리가 어떻게 들리니?’하고 물었다. 누군가 ‘동전 한 푼 동전 두 푼 이라고 하는 것 같다.’그랬더니 유관순 열사는 ‘내 귀에는 대한독립 대한독립이라고 들린다.’라고 했다.

 

▲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  © Eco-Times


그러자 일행은 모두 손뼉을 치며 ‘대한독립! 대한독립!’을 외쳤다. 놀란 차장이 달려오더니 "학생들 나 좀 살려달라고, 이렇게 하면 차가 통과할 수 없어요. 마음으로 하고 입으로는 하지 말아요. 나 잡혀가면 이차가 통행하지 못해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차장이 돌아가자 또 ‘대한독립 대한독립"을 외쳤다.

 

고향에 온 유 열사가 병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각 스님은 고향 집에서 40리를 걸어 공주형무소로 유 열사 면회 갔다. 그러나‘아직 나이가 어려 면회를 못 한다. 들여보낼 수 없다’라고 거절당하였다. 보각 스님은 "그럼 관순이는 나보다 한 살밖에 더 안 먹었는데, 왜 형을 주느냐?"했더니, ‘유 열사는 기생조합과 연락을 했으며, 장날을 이용하자는 둥 주모자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비록 어려도 형을 준다’는 대답을 듣고 돌아섰다.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은 서대문 형무소로 유 열사를 면회하려 했다. 그러나 보각 스님은 동창이 아니기 때문에 면회를 못 했다. 동창도 한 번에 3명씩만 면회했다. 그러던 중 유관순 열사가 1921년 1월 2일 만기 출소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은 한푼씩 모아 옷을 맞추고, 핀과 구두도 사며, 환영회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산보를 하는데, 대문을 두두리며 문을 열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까, 썩은 내가 진동하며 두 사람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죄인의 붉은 옷을 입은 채 누워있는 유관순 열사를 보고 모두 통곡했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토막은 나지 않았으나, 심하게 부패하였다.

 



‘지금도 둘이 지어 불렀던 노래가 생각나요.

이화 이화 정든 이화 잘 있거라.

우리가 독립된 담에 다시 만나자.’

 

 

Eco-Times 박충순 전문위원 dksrhr2@naver.com  ( 중국문학 박사. 전 유관순 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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