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진아가 부른 ‘사랑은 아무나 하나’ (작사·태진아,이건우 작곡·미상) 곡목의 노랫말은 줄탁동기의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한다. 가사 도입부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로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 혼자만의 짝사랑도 상대방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그렇다고 사랑을 ‘아무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 눈과 상대방의 ‘눈이라도’ 마주쳐야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이 마주침은 서로 마음의 창이 열리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굳게 닫혀있던 창이 서서히 열리면 상대방을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상호 마음의 창이 활짝 열리면 사랑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바꿔 말하면 사랑의 행복한 ‘만남의 기쁨’은 타이밍을 교감하면서 ‘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슬픈 ‘이별의 아픔’도 또한 나와 너 우리 둘이 만든다.
사랑은 ‘너와 내가’ 둘이 만나서 ‘점 하나를’ 찍을 때 그 정점에 도달한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처럼 사랑도 서로 합심하여 장단을 조화롭게 맞춰야 한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방법이 되어는 결코 사랑을 성취할 수 없다. 점 하나를 찍기까지 사랑의 집행 과정은 절대로 쉽지 않다. 서로 마음과 뜻을 수용할 준비가 존중되어야 한다.
사랑의 공든 탑을 쌓으려면 서로 겸손과 배려 그리고 희생정신이 요구된다. 곡목 ‘사랑은 아무나 하나’의 화자는 ‘만나고 만나도 느끼지 못하면 외로운 건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불꽃이 내면의 깊은 곳에서 서서히 피어오를 때 사랑이 가능하다. 이렇게 가슴 심저에서 불타오르는 진정한 사랑의 느낌이 없다면 오히려 절대 고독감만 가중된다.
하덕규가 부른 ‘자유’ (작사·곡 하덕규) 곡목의 노랫말은 줄탁동기의 함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가사에 등장하는 화자는 자신의 영혼 ‘껍질 속에서’ 살고 있다. 그의 ‘어린 영혼’과 ‘외로운 영혼’은 ‘슬픔’과 ‘아픔’이 뭔지도 모른 채 껍질 속에서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껍질이 자신인지 그리고 자신이 껍질인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눈물로 울부짖으면서 밤을 지새우곤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애타게’ 그리고 ‘목마르게’ 찾던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절창하는 노래는 마치 알 속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기 위해 부리로 지껄이는 고고성(呱呱聲)과 같은 맥락의 눈물겨운 노래다. 그렇다면 알 밖에서 껍데기를 쪼고 있는 닭 어미에 해당하는 존재를 화자는 과연 만났을까:
‘그를 만난 뒤/나는 알았네/내가 애타게 찾던 게 뭔지/..../내가 목마르게 찾았던 자유/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드디어 화자가 만난 ‘그’는 다름 아닌 껍질 밖의 스승 즉 종교적 멘토가 아닌가 싶다. 더 나아가 절대자와의 소중한 만남을 통해 껍질 속 화자의 영혼은 해방된다. 즉 가여운 인생의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찾는다.
손뼉은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사랑도 눈이라도 마주쳐야 사랑할 기회가 생긴다. 이때 사랑의 타이밍은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순간에 교감해야 서로의 가치와 채널을 공유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수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다양한 형태로 위험신호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위기가 닥치면 대부분 당황할 때가 부지기수다. 이럴 때일수록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줄탁동기의 적절한 맞장구를 치며 합심하여 위기 극복 노력을 할 때 비로소 위기는 사라진다.
초월적 신앙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알 속에 있는 병아리 새끼는 수행자이고 알 밖에 있는 닭 어미는 참 스승이다. 수행자와 스승이 손을 맞잡고 동일한 목표를 줄탁동기의 자세로 함께 지향하면 이 세상에 성취하지 못할 일은 없다.
Eco-Times 고재경 전문위원 (배화여대 명예교수/영문학 박사/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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