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렝게 아이막의 들판. 셀렝게(Selenge)강이 흐르는 이 지역은 수량이 풍부해 곡창지대이다] (장정택 촬영)
우연히 KBS 사우회에서 보내온 핸드폰의 메시지로, 퇴직전문가들의 해외 파견 프로그램이 한 기관에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의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National IT Promotion Agency)에 지원서를 냈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 면접도 봤다. 이 기관이 나의 몽골국영방송국(MNB, Mongolian National Broadcaster) 파견을 심사하고 허락했다.
발전도상국인 몽골의 방송국에 파견돼, 자문관으로서 이들에게 방송 교육을 시키라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었다. 지난 방송사( KBS, SBS, TBC ) 생활에서 방송 일로 해외 경험을 꽤 했지만, 이들에게 프로듀서 교육을 시키는 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시도이고 모험이었다. 내가 몽골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징기스칸의 나라’ ‘푸른 초원의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남쪽마을 아이락(Airak)으로 향하는 봄 길.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다. 이들이 들판의 바람과 맑은 하늘의 태양열을 이용하면 300만 몽골인의 전기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을거 같은데 겨울이 되면 석탄을 때서 전기를 만드니 울란바타르는 스모그로 가득하다]
필자는 2014년 부터 2017년 까지 3년간 몽골에 머물렀다. 방송 제작과 관련해 몽골 방송제작진에게 자문하고 강의하는 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몽골의 자연을 두루 체험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 탐사 기행을 소개한다.
메트로 몰(Metro Mall) 옆에 위치한 숙소를 나와 이흐델구르(국영백화점)로 향하는 길은 정해져 있다. 1층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먹을거리를 구입해야 한다. 앙카라 거리를 걸어서, 기상청 건너편 길을 건너 주르우르(JurUr) 빵집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이 숙소에서 백화점까지의 최단거리 길이다. 이제 몽골 생활 2년째가 되니 왠만큼 울란바타르 시가지 지리에 익숙해졌다.
[울란바타르 앙카라 거리]
골목길 한 모서리에 있는 건물 담장에 벚꽃이 피었다. 5월 중순이 되니, 이제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나 보다, 하고 지니고 있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한국에서 벚꽃 소식이 들려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몽골은 겨울이 길고 봄은 늦게 찾아온다. 활짝 웃고 있는 흰 꽃의 자태를 맞닥뜨리니 가슴이 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있었던가 싶다.
이번에도 조 봉연 사장(몽골 거주 한국인, 인테리어업)의 도움으로 두 번째 산행길에 나선다. 그가 징기스칸 공항 부근의 복드항(Bogdkhan, 몽골의 마지막 왕)산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한다. KOICA의 장 정택 자문관과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하는 최 사장이 동행을 한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둥그스름한 산의 초입에는 관광게르 캠프(Tourist Camp)가 있고 호텔로 보이는 높은 건물 한 채가 서 있다.
[울란바타르 남녘을 감싸 안고 있는 복드항 산]
조 사장이 운전하는 차를 세우고 우린 산 쪽으로 향한다. 산은 이제 연두색의 옷을 입기 시작하고 있다. 평탄한 들판과 산길에는 소와 말의 축분들이 듬성듬성 널려 있다. 몽골 초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보라색 할미꽃이 축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똥과 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나, 몽골에서는 이것 역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보라색 할미꽃]
몽골 유목민은 마른 축분을 거두어 들여 연료로 사용한다. 정상으로 향하면서 만나는 소나무와 자작나무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산길 가장자리에는 휘어진 자작나무가 아직 새싹을 틔우지 않은 채 간간이 서 있다. 어찌 보면 봄의 외로움이 서려있는 고즈넉한 풍경 같기도 하다. 늘푸른 소나무와 흰 줄기의 자작나무가 묘한 색깔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래된 자작나무는 말라 죽은 것인지, 나무 등걸이 고사목 형태로 서 있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산등성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고사한 자작나무의 흰 형해가 안쓰럽게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로 보라색과 노란 할미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소멸과 생성이 함께 하는 자연이다.
[이야기를 간직한 '야르구이(몽골 할미꽃)]
‘야르구이 야마(Yargui Yama)’, 이는 몽골어로 ‘할미꽃을 먹은 염소’를 일컫는 말이다. 마치 시의 한 구절 같다. 작년 이맘 때, UB(Ulanbaatar) 포럼 회원들이 울란바타르 근교로 이 염소 고기를 먹으러 간다고 희망자 모집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일이 생소하게 느껴져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가 막힌 허르헉(Horghog, 몽골 전통적인 고기찜 요리)일 줄이야.
할미꽃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몽골, 시베리아 대륙에 분포하는 여러 해 살이 초본 식물이다. 미나리아재비 과에 속하며 학명은 Pusatilla koreana Nakai이다. 진통제, 항염제, 항경련, 진정제의 약효가 있다. 4월에서 5월 초에 피는 할미꽃이 가장 약효가 좋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매운 맛이 나는 이 꽃을 보드카 술에 담궈 먹거나 달여서 먹는다. 더 좋은 방법은 할미꽃을 먹은 염소 고기를 먹는 것인데, 그 맛이 좋고 매운 맛이 난다고 한다.
몽골 3 대 보양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는데 나는 이 허르헉을 먹을 기회를 놓쳤다. 이즈음 피는 할미꽃이 가장 매운 맛을 내고 있다. 그 만큼 약효가 좋다는 뜻이다. 특히 유목민들은 방목하는 염소들 가운데 눈이 풀려 있는 염소를 골라잡아서 허르헉 요리를 한다고 한다. 염소가 뜯어먹는 할미꽃의 약효가 센 만큼 염소의 눈에 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인간은 주변의 자연, 그러니까 동물의 생태까지도 파악해 섭생을 하는 것을 보면 과연 만물의 영장인 듯싶다.
[알타이 산록을 배경으로 수테체(몽골전통밀크티 를 끓이고 있다. 몽골 북서부 지역은 5월에도 잔설이 남아있다]
옛날 할머니와 두 손녀가 살았다. 큰 소녀는 얼굴이 예뻐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 그런데 마음씨가 곱지 않았다. 작은 손녀는 얼굴이 미운 대신에 마음씨가 고왔다. 큰 손녀와 함께 살던 할머니가 그녀의 홀대를 받고 집을 나와 작은 손녀를 찾아 가다가 쓸쓸히 죽었다. 마음씨 착한 작은 손녀는 슬픔에 겨워하면서, 할머니를 산골짝 양지 바른 한켠에 묻었다. 이 할머니의 넋이 꽃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할미꽃이다.
나는 두 번째 산행에서 노란 할미꽃을 많이 만났다. 이른 봄인 4월에는 연보라색 할미꽃이 피고, 5월 초에 접어들면 노란색 할미꽃이 많이 핀다고 한다. 어질고 순한 할머니와 착한 손녀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야르구이’이다.
할머니가 마음씨 고운 손녀를 찾아가듯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산길에서도, 들판에서도 할미꽃은 일행을 줄곧 따라오고 있다. 오늘도 이 꽃은 여전히 고운 모습을 간직한 채 자연 속에 피어 있다. 그러나 가끔 가축이 이것을 먹고 또 이 가축을 사람이 먹는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몽골의 자연은 순환하고 있다.
Eco-Times 금 웅명 고문 (KBS 1기 PD)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10부작 등 연출(1990) -SBS 보도특집부장, 대구방송(TBC)보도국장 역임 -동아방송대학 영상제작과 교수, 몽골국영방송국 자문관 - '금웅 - 길 위에서' 유튜브 영상연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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