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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웅명의 문화기행 /몽골단상(12 - 3)] - 징기스칸의 정복전쟁-

Eco-Times | 기사입력 2023/11/03 [10:51]

[금웅명의 문화기행 /몽골단상(12 - 3)] - 징기스칸의 정복전쟁-

Eco-Times | 입력 : 2023/11/03 [10:51]

 

 

▲ 하르호린(Kharkhorin)의 에르데네 조(‘100개의 보석‘이란 뜻) 사원을 찾은 몽골인 가족



초원의 시월 하순 일요일 아침의 하르호린(Kharkhorin)은 차가운 대기로 덮혀 있다. 겨울로 가는 길목 날씨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옛 초원의 도시는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있다.

 

800여 년 전 이곳에서는 숱한 몽골제국의 기마 전사와 이웃 나라, 심지어 유럽대륙의 사신이나 포로들이 끌려와 북적이던 곳 아닌가. 드넓은 공간은 기마유목민의 공간이었다.

 

조금 떨어진 저곳은 우구데이 칸이 몽골제국의 영토를 유럽대륙까지 확장한 이후 300여 년이 지나 알타이 칸 때 건립한 사원이라고 한다.

 

▲ 에르데네 조 사원 안에 남아 있는, 다소 퇴락해 보이는 티벳 불교 사채

 

▲ 우구데이 칸(1187 – 1241),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 지력이 뛰어났고 술을 좋아했다.40여년 간 이곳을 발진기지로 유럽원정을 실시해 몽골제국의 영토를 중동, 유럽까지 넓혔다

▲ 총사령관 수부타이,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몽골제국의 개국공신으로세 명의 칸을 섬긴 장군이다

▲ 몽골제국의 고도 하르호린, 40년간 스텝 로드(Steppe Road, 초원길)의 중심지였다징기스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 칸이 1235년 이곳으로 수도를 정했다

 

몽골고원에서는 선비족(鮮卑族)이 선비제국을 건설한 이후 그 후예가 유연(柔然)·북위(北魏)·전연(前燕)·후연(後燕) 등을 각각 세웠다.

 

한반도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각축할 무렵인 6세기 중엽 이후 돌궐(突厥)·위구르·키르키즈 등 투르크(Turk, 돌궐)족이 몽골고원을 장악해 돌궐제국을 세우면서 선비족은 몽골고원 외곽으로 밀려 났다.

 

그 후 투르크 세력이 약화되는 8세기 중반부터 선비족은 다시 점차 고원 중심부로 돌아왔다. 10세기 들어서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契丹)이 몽골고원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몽골족은 투르크족에 의해 몽골고원에서 쫓겨난 선비족의 일파로 보여진다. 이들은 몽골고원 동부의 흥안령 일대 ‘에르구네 쿤’(Ergun Kun, 아르군강, 이 강은 실카강과 합류해 아무르강을 이룬다.중국, 러시아 경계) 지역의 몽골인, 유연의 후예인 ‘타타르 소칸국’의 몽골인, 즉 선비계 ‘실위인(室韋人, 아르군강의 몽올실위)’들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10~11세기 고비사막 남북 초원에 많은 몽골계 부족 연합체가 형성되었고, 11~12세기에는 전 몽골,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옹기라트 등의 부족이 몽골고원의 큰 세력이었다.

 

이 가운데 전 몽골족에서 ‘테무진 보르지긴’ - 테무진은 이름, 보르지긴은 성(姓)이면서 부족명 - 이란 영걸이 나타나 케레이트의 지지를 받아 메르키트를 정복하고 이후 타타르, 케레이트, 옹기라트, 나이만을 차례로 격파하여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테무진은 1206년 44세의 나이로 몽골의 대칸에 올라 징기스칸(Genghis Khan)이라 불렀고, 이로써 대 몽골제국이 출범했다. 서른두 차례에 걸친 전쟁과 전투의 결과였다.

 

▲ 징기스칸(1162 – 1227) 좌상, 울란바타르의 랜드마크인 징기스칸 광장에 앉아 있다.

 

▲ 몽골군의 전투 상상도, 기동성과 전투력이 뛰어난 기마군단이었다

 

 징기스칸은 몽골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금나라, 호레즘(Khorezm, 우즈베키스탄 북서부 오아시스 도시 무슬림 지역), 탕구트(Tangut, 중국 쓰촨 성, 칭하이 성의 티베트계 민족 강족羌族 지역)를 궤멸시키는 등 공포의 정복전쟁을 거듭하여 대 몽골제국(Yeke Mongol Ulus)을 건설하였으나, 1227년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징기스칸 기마군단의 강점은 군사조직, 즉 천호제(千戶制, Minggan-u Noyon)를 10진법에 기초, 조직해 전력 운용 시스템의 과학화를 도모했다. 10명(아르반), 100명(자군), 1,000명(밍간), 10,000명(투멘)의 기마 군사를 단위별로 편성해 책임제로 운영하게 했다. 이는 칸(Khan)을 중심으로 운영한 부족의 사회행정 체제이기도 했다.

 

당시 일반 보병의 하루 진군 속도가 20Km였는데 비해 말을 탄 몽골 군사들의 진군 속도는 70Km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속도로 대륙을 휘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병참 시스템은 일정한 거리에 역참을 두어 신속한 기마병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정보전달과 물자보급을 원활히 운영하게 했다. 심지어 한곳으로 진공할 때에는 그들은 사전에 마련한 곡물가루나 가축의 육포를 말 위에서 먹으며 진공 속도를 높혔다.

 

신출귀몰한 몽골 기마군단의 행태는 유럽의 기사단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력 운영형태를 보였다. 무엇보다 무거운 철갑을 갖춘 유럽의 기사단에 비해, 그들의 복장은 가벼워 기동하기에 편리했다. 그들은 지구력이 뛰어난 몽골 말과 활로써 유럽의 기사들을 대적했다.

 

▲ 말을 타고 달리며 몸을 돌려 뒤로 활을 쏘는 몽골 기마병 유럽에서 볼 수 없는 활쏘기 자세였다. 이들은 후퇴하는 척, 말을 몰고 달리다추격하는 유럽 기사단을 향해 몸을 돌려 화살을 겨누어 적을 물리쳤다

 

공성전(攻城戰, Siege Assault)이 벌어질 경우, 포로 가운데 전문 기술자의 노하우를 활용해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용맹했고 한편 엄격 살벌한 전법을 취하기도 해 몽골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곳으로 진공할 때, 적군은 먼발치에서 그 먼지 폭풍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도주했다고 한다.

 

몽골군은 순순히 항복하는 적에게는 관용으로 대했고 그렇지 않은 적에게는 도륙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몽골제국의 우세한 군사력은 정복, 약탈, 조공을 받는 것으로 점령 정책이 취해졌다. 그러나 피점령지의 농산물이나 물자를 영구적으로 생산, 공급하게 하는 경제력은 미흡했다.

 

결국 전쟁도 지속적인 경제력이 바탕이 돼야 우세한 군사력으로 오래도록 점령지를 통치할 터인데 그렇지 못해 서서히 몽골제국(1206 - 1368)은 위축되었다.

 

▲ 몽골산 보드카 병의 라벨, 징기스칸은 오늘날 몽골인의 일상에 살아있다. 화폐 도안에서부터 주류상품에 이르기까지 친숙한 인물이 되고 있다.

 

▲ 눈 내린 날 징기스칸 광장 앞을 걷는 울란바타르 시민들

 

20세기 들어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70여 년 동안 소련(Soviet Union)의 입김 하에 있었던 몽골 국민은 선조 징기스칸의 치적을 교육받을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옛 몽골제국 시절에 키에프(Kiev) 공국이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 아래 점령된 이후 200년 넘게 몽골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소련과 몽골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적 사실이 서로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자주적 국가로 재탄생한 요즘의 몽골 국민은 위대한 조상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다.

 

▲ 나담(Naadam)축제 때 몽골군 기마병의 퍼레이드와 몽골 국기의 국장문양

 

▲ 헝가리를 공략하는 몽골 기마군단, 몽골군은 8개월 동안 헝가리를 약탈, 파괴했다.이러는 동안 우구데이칸의 사망으로 몽골 원정군은 초원으로 돌아가 쿠릴타이 회의를열고 다음 대칸으로 구유크칸을 선출했다.

 

▲ 이른 아침 호텔 창밖으로 본 하르호린 마을게르(이동 천막집)와 푸르공(Furgon, 소련산 승합차)은 몽골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1229년 징기스칸(Genghis Khan)을 이어받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Ogotai Khan)는 카라코룸(현재 하르호린)으로 천도하고 금을 멸망시킨 후 서역 정복전쟁을 전개했다. 그는 킵차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등 유라시아 지역을 차례로 정복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시베리아·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13세기 당시 이곳을 찾은 유럽인은 카라코룸을 ‘파리 외곽에 있는 생드니(Saint-Denis)보다 작은 도시’ 혹은 '멀리서 보는 로마‘로 기술하고 있다.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았나 보다. 징기스칸의 아들인 오고타이(Ogotai, 우구데이) 칸 시절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고작 40년에 불과했던 전성기를 지나 쿠빌라이(Khubilai) 칸이 수도를 한발리크(대도 大都, 베이징)로 이전하고 국호를 원(大元)으로 고쳤기 때문에 도시 확장의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 고도 하르호린(Kharkhorin) 전경

 

이곳에는 직공과 무역상, 학자, 승려, 몽골족이 잡아온 포로들이 살았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도시 밖 초원의 게르에서 살았다.

 

도시는 네 개의 성문이 사방으로 나 있고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각 성문에는 시장이 섰다. 동문에는 곡물이, 서문에는 염소가, 남문에는 소와 무기가, 북문에는 말이 거래되었다.

 

몽골의 칸(Khan, 왕)들은 종교적 포용력을 지녀 도시 안에는 열두 개의 다른 종교가 공존해, 모스크, 불교 사원, 네스토리우스(페르시아) 교회 등이 들어서 있었다.

 

도시 안 한쪽에는 1235년에 건설된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이 거주하던 궁전이 있었다. 이 궁전 안에는 외교관을 맞던 거대한 응접실과 예순네 개의 기둥이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민족, 종교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지구촌의 전쟁 양상을 볼 때 이들의 개방성은 놀랄만하다.

 

그리고 각종 잔치에서 몽골인들은 수레 105개에 해당하는 술을 마셔댔다고 프랑스 선교사가 기록을 남긴 사실들로 미루어 봐, 이곳은 몽골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였고 아시아 대륙의 허브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침공해 수중에 넣었던 몽골제국 시대를 상상해 보면, 이곳이 바로 국제 교류가 왕성했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청나라 군대의 파괴와 사회주의 시절 소련 정책에 의한 몽골 문화 유적 말살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진 게 유감이다.

 

▲ 하르호린 궁전 앞에 설치되었던 실버 트리(Silver Tree) 모형 (호텔 몽골리아 소재)이 나무 아래 4개의 술 항아리가 비치돼 있어 방문객은 무료로 각종 술을 마셨다고 한다

 

▲ 건축 장식용 탈, 13세기, 하르호린 솜 우르항가이 출토(자나바자르미술관 소장)

 

▲ 에르데네 조(Erdene Zuu) 사원의 사리탑

 

일행은 대제국 지도 기념비에서 내려와 아침을 먹기 위해 조용한 호텔 식당에 들렀다. 호텔에 딸린 식당이 매우 깨끗했다. 진작 알았다면 이곳을 예약하고 이용했을 텐데. 아침 식사로 나온 우유가 들어간 밥(, 수프 종류), 토스트에 버터, 잼까지 정갈한 서비스가 마음에 든다. 1인당 5,000투그릭의 값어치를 충분히 하고 있다.

 

식당 창밖 저만치 에르데네 조(Erdene Zuu, ’100개의 보석이란 뜻) 티베트 불교 사원의 흰 사리탑들이 눈에 들어온다. 16세기 알타이 칸(Altai Khan)이 세운 몽골 최초의 불교 사원, 저곳에는 옛 흔적이 남아 있을까.

 

# 몽골단상 12 4 편은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생태환경뉴스 Eco-Times  / 홈페이지: eenews.kr
 

Eco-Times 금웅명 고문producerkum@daum.net

[MNB (몽골 국영방송국) 방송 자문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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