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삭풍 맞은 한·러 관계]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아니지만, 한·러 관계에 시베리아 삭풍이 들이닥치리라는 징후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 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난 6월 19일 블 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그 결과로 나온 러·북 재동맹 구축 선언은 한반도 상공에 신냉전의 암운을 강렬하게 쏘아 올렸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에 쌓인 불만을 작심하고 해소하면서도 한·러 관계를 파탄 내지 않으려는 여지를 남겼다. 서울이 제시 한 레드라인(러시아 첨단 무기와 군사 기술의 대북 제공) 을 완전히 넘었다고 볼 순 없지만 이미 한쪽 발은 선을 넘은 모양새다. 북한을 지렛대로 한국에 앙갚음하는 러 시아의 외교·안보적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한국 정 부의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푸틴의 방북 의도와 목적은 한반도와 동북아 수준을 넘어 러시아의 글로벌 전략 차원에서 실행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현실정치 적 맥락에서 푸틴의 평양 방문을 추동한 요인은 무엇일 까? 이번에 북·러가 체결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이하 ‘신조약’)의 핵심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 게 해석·평가해야 할까? 위기의 한·러 관계를 안정적으 로 관리할 묘책은 있을까?있다면 무엇일까?
푸틴이 몰 고 온 지정학적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시점에서 북·러 군사 동맹의 부활 원인과 그 파장을 냉철하게 진단 하고 한국의 국익과 안보에 유익한 방향으로 그 해법을 차분하게 모색할 때다.
[나토의 동진이 추동한 러시아의 동진]
크렘린 권좌에 벌써 다섯 번째 등극한 푸틴 대통령이 지난 5월 7일 취임 이후 네 번째 순방 국가로 북한을 선택했다. 2023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발부 한 체포영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5.15~16), 벨라 루스(5.23~24), 우즈베키스탄(5.26~28)에 이어 평양 (6.19~20)을 방문한 것이다. 북한 방문 후 푸틴은 곧장 베트남(6.20~21)으로 날아갔다.
푸틴의 왕성한 순방 외 교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처한 국제적 고립 을 타개하기 위한 강한 의지의 산물이다. 우크라이나 돈 바스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다섯 번째 대권 쟁취에 성공 한 것도 대외적 광폭 행보를 추동한 중요한 요인이다.
푸틴의 분주한 대외 동선에서 몇 가지 특징이 관찰된다. 순방 대상이 러시아의 전통적 우방국이고 반미 또는 견미에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으며 자웅동체의 동맹국 벨라루스를 제외하고 모두 유라시아 동단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서구 세계와의 단 절 심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푸틴 정부의 ‘아시아 회귀’ 전략 강화이다. 말하자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구가 가한 고강도 제재로 악화한 경제·외교적 고립을 유라시아 동쪽에서 뚫어보겠다는 심산이다.
영토의 서쪽 날개에서 막힌 출구를 동쪽으로의 진출 확대를 통해 타개하겠다는 것인데, 역사적 맥락에서 설명하면 이렇다. 13~15세기 몽골·타타르 지배 이후 유럽에서 격리된 제정 러시아가 표트르 1세(대제)의 집권기인 18세기 초 유 럽 회귀 전략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 정책을 선택했다면,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의 대결에서 밀려 난 현대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지정학적 ‘닻’을 내리려는 탈구입아(脫歐入亞)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푸틴 5.0 시대, ‘동’과 ‘서’ 사이에 위치한 러시아는 유 럽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일종의 보상 기제적 차원에서 유라시아 동쪽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이른 바 신동방정책을 적극 전개할 것으로 예측된다.
21세기 러시아의 탈구입아 정책에서 한반도 전문가들의 최우선적 관심사는 러시아의 대북 전략적 밀착과 북·중·러 삼각 협력 체제의 활성화 또는 유기적 작동 여부다. 우크라이 나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제재나 견제를 받는 북·중·러 권위주의 삼국 간 협력을 강화해 주는 지정학적 요인으 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건 한반도를 넘어 동북 아시아의 안보 환경을 훼손하는 북·러 간 위험한 군사 거래와 결속이다.
[러·북 ‘신조약’의 관찰 포인트]
지난 6월 19일 푸틴의 방북을 계기로 우려는 목전의 현실로 나타났다. 언론 보도대로 러시아와 북한은 총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조약’을 체결했다.
유리 우샤코프 크 렘린궁 외교·안보 보좌관은 2024년 ‘신조약’이 1961년 ‘소·북 우호 협력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과 2000년 ‘러·북 우호 및 선린 협력 조약’, 2000년 ‘평양 공동선언’, 2001년 ‘모스크바 공동선언’을 대체한다고 친절하 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북·러 관계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특별한 시기 ‘퀀텀 점프’에 준하는 급격한 관계 격상을 이룬 것이다.
북·러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 ‘신조약’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본 문건이 공동성명이나 ‘협정’이 아닌 ‘조약’이라는 점이다. 1998년 이명박 정부 시절 한국이 러시아와 맺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조약이 아니라 공동성명으로 채택됐다. 조약은 체약국의 권리와 의무를 당사자 간 합의로 규정한 공적 문서로, 의 회 비준이 필요하므로 법적 구속력이 있다.
그런 측면에 서 북·러 관계는 외교적 수사나 형식에서 한·러 관계보다 더 높은 관계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급전직하한 한·러 관 계와 수직 상승한 북·러 관계가 명징하게 대비를 이룬다. 한·러 관계와 북·러 관계는 제로섬 관계라는 현실을 다시 금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자동 군사 개입’으로 간주할 수 있는 안보 조항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신조약’ 제4조는 체약국 중 일 방이 무력 침공을 받을 경우 상대방의 즉각적이고 모든 보유 수단을 동원한 군사 원조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들어간 1961년 북·소 동맹조약을 연상시킨다.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제4조는 북·소 상호 방위조약의 부활, 즉 군사 동맹 관계의 복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거 소련 시절처럼 러시아가 중국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북한의 안보적 후견 세력으로 공식 자임 하고 나선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러시아가 북한 의 든든한 군사적 ‘뒷배’임을 호가호위하듯 육성으로 직접 확인해 주었다. 6월 19일 평양 정상회담 후 가진 공 동 기자회견에서 푸틴을 면전에 두고 북·러가 “동맹 관계라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라며 전 세계를 향 해 동맹의 부활을 강한 어조로 선언했다.
한국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제4조 안보 조항은 러·북 간 군사적 밀착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크렘린은 한국의 반러시아적 행보에 대한 실망감을 대북 군사·전략 적 연대 강화, 즉 재동맹으로 표출했다. 이는 러시아의 입장에서 일종의 비례적 대응으로 서울의 급소를 건드리는 보복 조치에 다름 아니다. 러시아는 자국이 제공한 첨단 방산 기술을 습득해 세계 무기 시장 메이저 리그에 진입한 한국이 적성국 폴란드에 이어 교전국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 공급 가능성을 시사한 것에 대해 큰 배신감과 함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서구가 가한 지옥의 제재에 우호국 한국이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과는 다르게 적극 참여한 것도 크렘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하 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우회 지원과 윤석열 대통령 의 키이우 방문은 마침내 크렘린의 ‘꼭지’를 돌게 했다.
작년 9월 푸틴이 김정은을 전격 초대해 극동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러·북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올해 6월 에는 평양을 직접 방문해 동맹 수준의 군사적 결착을 선언한 이유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인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북한을 지렛대로 한국을 길들이고, 한국을 통해 북한을 순치시키는 이른바 이한제한(以韓制韓) 정책을 즐겨 구사했는 데, 이번에도 러시아는 한국을 길들이는 맞대응 차원에 서 북한 카드를 꺼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남·북한 분단 이라는 지정학적 현실이 지속 가능한 한·러 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 요인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셋째는 조약문 곳곳에 ‘숨은그림찾기’처럼 한·러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점이다. 러시아 는 한반도 유사시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동시에 지정학적 상황 변화에 따라 안보 조항을 유연하 게 적용 또는 파기할 수 있는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조약 이행 절차에서 조건적 단서 제시를 통해 안보 조항의 의무를 회피할 수 있는 브레이크를 달아둔 것이다. 1961년 소·북 동맹조약 제1조는 “어느 일방이 다른 국가나 국가연합의 무력 공격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면, 상대방은 가용한 모든 군사 및 기타 지원을 즉각 제 공한다”라고 명시했다. 본 문건에서는 조약 이행의 어떤 전제조건도 없다.
반면 ‘신조약’ 제4조는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상대방 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 아연방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적시 했다.
1961년 조약과는 달리 2024년 ‘신조약’은 “유엔 헌장 제51조와 러시아 국내법”이라는 이중 장치로 자동 군사 개입 의무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결국 ‘선택권’을 쥔 러시아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북·러 조 약의 실질적인 효력이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1.러시아의 의도를 조심스럽게 추론하면, 한국의 과도한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을 억지하면서도 향후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헤징(hedging·위험 회피) 장치를 배치해 둔 것으로 보 인다. 조약 파기 절차에서 유연성을 강화한 점도 동일한 맥 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제23조는 조약의 효력을 무기한 으로 설정했지만, 언제든 체약국 일방이 파기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경우 1년 후 효력이 자동 상실하는 것 으로 규정하고 있다. 언제든 상황에 따라 1년 뒤 조약 탈퇴가 가능하게 한 것이다.
2.이 조항 역시 가역성을 담보 하는 조치로 러·북 준동맹 관계가 단기 전략 차원에 머무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 밖에도 러시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라는 현대 양자 관계의 개념을 빌려 대북 관계를 재정립한 점, 푸틴 대통령 등 고위층이 동맹 이라는 용어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는 점, 북한과는 달리 ‘신조약’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은 미래 출구 전략의 일환으로 한·러 관계 복원을 염두에 둔 신중하 고 치밀한 조치로 풀이된다.
[북·러 ‘신조약’ 평가와 함의]
동맹 수준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선언한 북·러 ‘신조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천학비재(淺學菲才)한 필자의 관점에서 ‘신조약’에 대한 평가와 함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북·러가 군사 협력 중심의 양자 관계 격상과 함께 반미·반패권에 기초한 국제적 연대 강화를 서구를 향해 큰 목소리로 과시한 점을 지적할 수 있 다. 서방 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북·러 두 핵보유국 간의 군사·안보적 결착은 국제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에도 치명적 위협이 될 게 자명하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한반도가 미·러 패권 투쟁이 야기한신냉전의 전초지가 되어 무력 충돌의 우발성과 휘발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모스크바가 평양의 보호자 역할 을 자임함에 따라 북한의 비핵화는 물 건너갔고, 대북 제 재의 실효성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완화되어 한국 주도의 통일도 어려워질 수 있 다. 한국이 서구의 반러시아 정책에 적극 가담한 후과일 것이다. 북·러 관계 측면에서 ‘신조약’은 급변하는 국정정세 속 에서 모스크바와 평양이 추구하는 전략적 이익이 다양한 수준에서 일치하고 수렴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무기·포탄 공급 등 러시아를 전 폭 지원한 북한은 그 반대급부로 합당한 소정의 청구서 를 내밀었고, 크렘린은 통 크게 수용한 듯 보인다. 시간 이 갈수록 러시아는 중국을 대신해 김정은의 위시리스트 를 충족하는 ‘슈퍼마켓’이 되어 가고 있다.
만성적 식량· 에너지난뿐만 아니라 전략난에도 시달리는 북한에 대한 원전 건설 지원 약속이 이를 방증한다. 중국이 배타적 세력권으로 간주하는 북한을 러시아가 과도하게 얼씬거리는 것을 좋아할리 만무하다. 중국도 더 자유롭게 중앙아시아를 휘젓고 돌아다닐 것이다.
러시아의 대북 ‘신조약’ 체결이 한·러 관계에서 갖는 함의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일차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한국의 적대 행위에 대한 조건반사적 반작용의 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을 웅덩이에 빠뜨리고 크게 물 먹인 것이다.
한국을 미국의 품 안에서 끌어내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워싱턴의 위계적 동맹 질서 아래 있는 서울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한 결과이 기도 하다. 한·러 간 경제적 상호 의존성의 감소도 한몫 거든 듯하다. 모스크바가 서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평양과의 관계 수위를 조절할 정도로 한국이 유망한 경제 협력 파트너였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 변화 측면에서도 평가가 가능 하다. 형식상으로 러·북 ‘신조약’은 상대적으로 소원했던 대북 협력의 수준과 밀도를 현저히 강화함으로써 한국에 치우친 외교적 가지(柯枝)를 평평하게 펴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내용상으로 북한에는 ‘보은’, 한국에는 ‘뒤끝 작렬’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신조약’에서 피침 시 북·러 간 상호 군사 원조를 규정한 제4조 안보 조항 삽입은 서 울에 이제 더는 레드라인(살상용 공격 무기의 우크라이 나 직접 지원)을 넘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성 시그널로 읽힌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둘러싼 한국의 자유로운 외교적 행위를 단속하고 속박하려는 일종의 겁박 인 것이다.
[칼날 위에 선 한·러 관계, 봉합을 위한 묘안은?]
러·북 ‘신조약’ 체결 이후 한·러는 연일 상대방을 향해 레드라인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지난 6월 21일 장호진 안보실장은 러시아가 북한과 군사 동맹에 가까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을 맺은 것을 두고 레드 라인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강경한 메시지를 발신했다.
크렘린의 후속 반응은 더 격렬했다. 푸틴 대 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는 것 은 아주 큰 실수”가 될 것이고 “우리는 북한에 초정밀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보복 경고 로 맞대응했다. “선 넘지 말라”라는 한국의 날 선 경고에 “넘으면 어쩔 건데”라고 러시아가 비웃는 모양새다.
주지하듯 현재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직접 지원하라는 서구 세계의 강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 역시 한국의 행보를 예의주시하며 군사적 대북 밀착 수준과 강도를 조절하고 있다. 만약의 현재화, 즉 금지선의 월선(越線)은 서울과 모스크바 모두에 불행을 가져온다.
북한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한·러 간 직·간접 적인 군사적 대립 구도 형성은 상호 소모적이고 비생산 적인 비용 지출을 요구할 것이다. 양국의 협력이 제공해주는 미래의 기대이익에도 지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유라시아 전문가 대다수가 지적하듯, 한·러는 지정학적·지경학적 측면에서 상호 보완적이고 호혜적인 공유 이익이 많아 우호 관계 유지가 양국 모두의 국익에 부합한다. 한·러 관계의 경색이 과연 누구의 이익에 봉사 하는지 곰곰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한·러는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형세다. 각기 북한과 우크라이나라는 사활적 이익에 갇혀 있어 의견 차이를 좁힐 여지가 적어 보인다. 다행히도 양측은 구두경고를 실행에 옮기지 않아 아직 레드라인을 완전히 넘었다고 보기 어렵다. 비유적으로 표현해 서로 멱살만 잡았지 상대방을 위해(危害)하는 주먹까지 휘두르지 않은 것이다.
감정 악화의 상승 곡선을 그 리는 이런 ‘강 대 강’ 대치 상황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 것인가? 북·러 ‘신조약’ 체결을 둘러싼 대응책 마련과 해법을 놓고 국내 여론은 극명히 갈린다. 보수 강경론자들은 ‘신 조약’을 동맹의 부활로 규정하고 단호한 ‘팃포탯(Tit for Tat)’을 주문한다. 대러 독자 제재 강화, 수출 통제 품목 확대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단계적으로 제공하고 이와 병행해 한·미 간 확장 억제와 한·미·일 안 보 연대, 그리고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의 군사적 공조를 강조한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독자적인 핵 보유까지도 요구한다. 러시아에도 상응하는 안보 딜레마를 안겨줘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진보 성향의 온건론자들은 현실론에 입각한 유화책을 제시한다.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제공하는 것은 대러 지렛대를 상실하는 것이고, 제공한다고 한들 우크라이나 전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어떤 종류의 강압 전략을 구사하든 크렘린을 굴복시킬 수 없다면 역학 구조상 이것이 온전히 북·러 동맹 관계의 심화로 귀결되고 결국 한반도가 미·러 간 힘 의 충돌 지대가 되어 우크라이나에 이어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요지는 한국이 신냉전의 최전선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급소를 겨냥한 강력 한 지렛대를 갖고 있으니, 한국이 먼저 선공을 가할 필요 가 없다고 본다. 러시아는 현재 전쟁 중이라 굉장히 민감 하고 화가 잔뜩 나 있어서 강경 대응은 예측불허의 또 다른 보복을 초래할 수 있다. 자존심 상하고 내키지 않지만, 현재로선 유화적 대응이 상책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행패에 굴복하자는 게 아니라 ‘강 대 강’ 대치의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유화 정책을 구사함으로써 러시아 내부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너무 몰아붙이는 게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게끔 하는 것이다.
3. 충격 방지용 가 드레일 설치를 위한 공식·비공식 고위급 소통과 물밑 대화도 필요하다.
푸틴 대통령은 방북 전 여러 공식 모임에 서 “한·러 관계가 악화하지 않고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라는 요지의 메시지를 서울을 향해 꾸준히 발신해 왔다. 그 신호를 제대로 포착해 북·러 군사적 밀착을 제어하고 위기의 한·러 관계를 연착륙시킬 수 있는 출구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한국의 대러 정책 단상]
북·러의 동맹 부활을 두고 국내 일각에서는 외교 참사, 대러 외교 실패로 규정한다. 미국 일변도 외교가 낳은 재앙이라는 것이다. 사실 한·러 관계 악화의 본질적 문제는 양국의 국익 충돌 때문이 아니라 한·러 관계의 미·러 관 계 동조화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크라이나가 한국의 안보와 국익에 얼마나 큰 상관이 있을까? 한국이 추구하는 다중적 국익과 안보를 놓고 볼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라시아 패권 장악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우크라이나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 고 있는 미·러의 권력 투쟁에 워싱턴의 동맹국 한국이 연루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1990년 수교 이후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 노선 변화 과 정을 세밀히 추적해 볼 때, 러시아의 대한(對韓) 정책 수 정이 대미 정책 수정 과정과 거의 일치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러 관계가 미·러 관계에 의해 크게 영향받아 왔음을 의미한다.
이 경우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한국이 대러 정책에서 독자성을 제한받아 온 것 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이 대러 정책을 자발적으로 미국 의 그것에 일치시켜 왔다는 분석이 성립된다. 판단컨대 후자보다는 전자로 해석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국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대외적 행보는 워싱턴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반대편에 있는 대중 정책, 대러 정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측면에서 2014년 박근혜 보수 정부의 독자적인 대러 정책은 모스크바와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를 만들기 위한 어려운 용단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시 서구 의 강한 압박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의 국익을 고려 해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와 60일 무비자 사증 면제 협정을 맺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시범 사업의 일환으로 한·러 공동으로 시베리아를 가로 지르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까지 추진했다. 그런데도 한·미 동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미 동맹이 한 국 외교의 근간이고 핵심축이지만, 한국의 이익에 항상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만병통치약도 아니라는 점을 명료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러 관계가 원만할 때 한· 미 동맹도 건강해지고 공고해진다는 신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외교의 내적 균형 역량이 그런 대외 정책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외교적 자율성을 확대 해 나가는 노력과 병행해 한·러 관계를 한·미 관계의 종 속변수로 보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한·미 동맹과 한· 러 전략적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창조적 실용 외교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러시아와 미국이라 는 이분법적 선택의 도식을 넘어선 것으로 한국 외교의 새로운 혁신과 도전을 의미한다.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글로벌 중추 국가 비전은 ‘편승적 가치 외교’가 아닌 ‘균형적 실용 외교’에 바탕을 둬야 하고 이런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북·러 의 재동맹 선언으로 한반도에 화약 냄새가 조금씩 강하 게 풍기는 듯하여 걱정이 앞선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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