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바람이 부는 톨(Tuul) 강 근처의 자그마한 숲을 찾는다. 나무들은 온통 노란 색깔로 밝고 고운 옷으로 바꿔 입고 있다. 심지어 황갈색 톤으로 변하는 나무도 있다. 갈색 톤의 묵직한 빛을 발하는 나무도 있어서 좋다.
처음 느끼는 몽골의 가을 경치에 마음마저 들뜬다. 황홀할 정도다. 고교 시절 사생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갔던 경주의 계림 숲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개최된 대한적십자사 주최 전국 미술대회에 참가해 풍경화를 그렸다. 이 작품이 서울로 올라가 특선으로 뽑혔고 국무총리상에 선정돼 전교생들이 모인 아침 조회에서 적십자사가 보내온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처음 수상하는 큰 상이었다.
그 후 나는 시간이 나면 그림과 인연을 맺어왔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야외 사생을 서울 근교로 나가는 등 주로 풍경화 위주로 그렸고 가끔 정물화를 그리곤 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인물화였다. 데생 실력이 밑받침되어야 하는 인물화의 경우, 나는 표현의 미숙함을 자탄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몽골의 단풍 숲은 한국에서 보았던, 포근한 감성을 자아내는 숲이 아니다. 그곳은 세월 따라 휘어진 고목들이 서 있는 곳이고 이곳은 곧은 나무들이 서 있고 단풍 든 나무들의 모습이 성글다. 위도가 높은 이곳이라, 대륙성 기후 탓인지, 단풍 색깔도 달라 보인다. 잠간 동안 화려하게 물들었다가 이내 떨어질 순간의 나뭇잎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침 일찍, 공항 근처 골프장이 있는 이곳으로 후배 이 교수가 운전하는 차편을 얻어 타고 온 것은 잘한 일이다. 이곳저곳에 노란 잎들이 땅에 떨어져 무심하게 깔려 있다. 낙엽 몇 잎새는 간혹 연달아 부는 아침 찬바람에 흩날리기도 한다. 낙엽이 발길에 밟힌다. 불현듯 구르몽(Gourmont)의 시구절이 떠오른다.
낙엽
시몬, 나뭇잎 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미학적 기준에서 주로 글을 쓴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인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 - 1915)의 유명한 시다. 모든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 애호가)들이 애송하는 시이기도 하다.
나는 어릴 적 이 시를 아버지의 군대 시절 사진첩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시(詩)가 무엇인지, 시어(詩語)가 어떤 것인지도 모를 때이다. 어르신들의 낭만적 감성이 가득하던 시절에 이런 시를 좋아했었나 보다, 했는데 내가 어느새 아버지를 따라가는 나이를 훌쩍 넘어서고 있으니, 인간 역사는 반복하는가 보다.
나에게 수채화 그리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함께 이곳을 찾았던 장 자문관이 촬영한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속의 내가 마치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의 분위기가 일견,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을 들판을 화구를 들고 외로이 걷는 모습이 닮았다. 고독한 모습이다.
1888년 고흐는 복잡한 파리가 싫어서 프랑스 남부 아를르(Arles) 지방으로 활동 거처를 옮긴다. 밝은 빛과 자연과 사람을 찾아 떠난 아를르 지역이 그에게는 예술혼을 불태운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 완숙한 화필로 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머물었던 집주인, 호쾌한 성격의 우체부 등 그의 작품을 위해 모델이 돼 주었고 아를르 주변의 자연과 포도밭 농부들과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일상 등은 중요한 그림의 오브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남부 지방의 모든 것은 인간과 자연과 현상을 응시하고 느껴 표현하기에 충분한 현장이고 그야말로 창작의 산실이었다. 바로 그 현장에서 순간의, 찰나의 햇빛 광선이 만들어 내는 대상의 질감과 색감을, 그가 받아들이는 인상대로 표현하는 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경향이었다.
강렬한 색감과 붓 터치로 밀밭, 별밤, 밤의 카페와 지누 부인(Madame Ginoux) 등을 그린 작품들이 이때 쏟아진다. 미술사에서 그의 이 시절을 ‘아를르 시절’이라고 구분한다.
그는 이때까지도 이름을 알리지 못한 화가였고 그만의 고독을 열정적인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30대의 고흐는 예술적 감흥으로 그림에 미쳐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다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먼발치에 서 있는 아마추어 화가이다. 화구들은 한국에서 몽골로 오면서 가지고 왔는데 지금껏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기회가 없었다. 화구가 숙소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게으름을 피운 탓이다.
올봄에 실내에서 그림을 그려본 이후, 모처럼 야외에서 수채화를 그리려니 흥분되기도 한다. 우선 가을 단풍 색깔이 곱다. 수채화로 표현하기에 가을 숲의 색깔이 추수철을 연상시키면서 곧장 겨울로 향하고 있는 풍경이다. 북쪽 셀렝게(Selenge) 지역은 밀밭 수확이 한창일지도 모른다.
몽골의 가을은 짧다. 몽골인들은 한여름인 7월 상순, 나담(Naadam) 축제가 끝나면 이내 가을이 오고 눈 내리는 겨울이 온다고 한다.
그리고 화폭의 구도를 고려하면, 근경, 중경, 원경이 있는 적절한 장소를 택해야 한다. 이리저리 구도를 잡기 위해 정오의 가을 숲을 헤매는 동안 장 자문관이 내 뒷모습을 촬영했다. 화구를 담을 수 있는 통 겸 이젤 기능을 하는 나무 박스를 들고 그림 구도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이다. 나는 야외 사생 며칠 후, 몽골의 단풍 색깔이 이채롭고 아름답게 찍힌 몇 컷의 사진을 안부도 전할 겸 서울의 후배에게 보냈다.
“북녘이라 확실히 단풍이 빠르군요 한국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가을 풍경입니다 숲속의 형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가을을 화폭에 담으려고 불편한 자세를 감수하면서 혼자 작업을 하셨군요 외로움도 살짝 느껴집니다“
내가 보낸 사진을 보고 절친한 후배가 답신을 보내왔다. 사실 외로움을 넘어 인간존재는 어찌 보면 고독한 존재가 아닌가.
나는 대학 시절부터 독일의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내가 어렴풋이 느끼는 감을 그가 너무나 극명하게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규정한 인간존재는 피투성(被投性, die Geworfenheit)이다. 자신의 바람과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래서 고독을 본원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 김 현승(1913 - 1975)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시로써 고독을 몸부림 끝에 읊었다. 내가 생각하는 몸부림은 시인의 주지적인 시의 표현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또한 그 만의 언표(言表)는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시대를 살아온 그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를 치열하게 고뇌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인간 영혼의 탐구자였다.
절대고독(絶對孤獨)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
시인의 고절(高絶)한 내면세계와 그의 시적 표현을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표현한 시구 가운데 몇 군데는 공감이 간다. ‘영원의 먼 끝’과 ‘무한의 눈물겨운 끝’은 무엇을 말함인가.
인간 본연적인 고독을 가진 채, 시인은 절대성을 실감한 것은 아닌지. 도저히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인간 조건의 한계 속에서 그 무엇, 끝을 추구한 투철한 시인 정신이 존경스럽다.
하이데거(Heidegger)는 현대인의 삶이 전적으로 과학 기술에 의존하는 시대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중세 서양 사람들이 신에게 의존, 귀의를 바랐다면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과학의 힘에 의존하는 기술인으로 전락했다고 규정한다.
그들은 자연재해는 공학 기술에, 질병과 노화 등 육체적 고통은 의학과 의료 기술에, 사회정치적 문제는 정치 공학과 정치 기술에 의존해야 한다는 지배적 사고를 갖고 있다.
그는 기술 문명을 추동하는 그 기저에는 지배를 위한 의지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이를 ‘기술적 존재 이해’라고 한다.
기술 문명에서 벗어나, 시인이 인간 본성으로 세계와 사물을 경이롭게 바라보듯이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서로 대화하면서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세계, 즉 세상 사람들이 ‘신비를 느끼는 시인’으로 살 때 ‘고향(Heimat)으로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린 그동안 기술인으로 너무 수치화, 계량화되어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런 까닭에 허무적이고 감상적인 고독감을 더 느끼는 것은 아닌지. 심하면 이게 병이 되기도 한다.
몽골의 가을은 있는 그대로다. 예년의 가을은 9월 말 이맘때 눈이 오고 추웠다. 그런데 올가을은 나무의 이파리가 노랑, 주황, 황갈색으로 매무새를 고쳐 입고 있어 그 모습이 찬란하다. 초원의 유목민들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듯이 풍경이 자연스럽고 평화스럽다. 단풍의 색깔도 자연이 만드는 대로 물들고 있다.
13 세기 징기스칸의 정복, 약탈 전쟁 시대에 실크로드가 있는 남쪽, 서쪽 지역으로 진출해 화려한 비단 옷감이나 장신구 등을 전리품으로 획득해 왔을 것이다. 옛 천호장 부인의 전통복장 패턴과 색상이 이토록 아름다웠을까. 노마드 유목민 여인이 입은 옷이 유독 화려한 이유가 수긍이 가기도 한다. 단조로운 몽골 고원의 자연 속에서 찬란한 의상은 미적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했을 터이다.
몽골의 겨울 색은 침잠의 색이다. 온통 설원이 펼쳐지는 흰색이다. 심리적으로는 움츠러드는 검은색일 것이다. 봄은 초원에서 연두 색상이 펼쳐진다. 여름은 가축을 위한 진수성찬, 300여 가지의 목초가 쑥쑥 자라는 녹색 들판의 향연이 벌어진다. 가을은 몽골만의 가을 색,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확과 모든 생명을 잉태한 재생산을 위한 황갈색 색상이 들판을 뒤덮는다.
자연이 연출하는 조화가 사계절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마치 자연의 색상은 몽골 여인의 전통복장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은은한 색상의 한복과 엇비슷하면서도 이와 다르게 색상과 디자인이 강렬하다. 단조로울 수 있는 초원과 사막 한가운데서 몽골인들은 변화를 추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밝은 노란 원색의 수채화 물감 튜브를 짠다. 물감을 풀어 그대로 화폭의 바탕색으로 쓱쓱 칠한다. 연두색 물감도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초록색이 감도는 나무가 있다.
그런 다음 나무의 형태를 보아가며 명암을 살핀다. 그리고는 조금씩 어두운 색깔을 칠한다. 마지막에는 가장 어두운 계통의 색깔을 조금씩 칠해 그림의 콘트라스트를 살린다.
간혹 먼 곳 나무들의 단풍 색 표현은 노랑이나 주홍색에 흰색을 섞어서 한다. 내가 즐겨 쓰는 무채색이다.
원근감이 살아난다. 이제 단풍든 나무들의 입체감이 생겨나고 청명한 가을 한낮의 햇빛이 살아난 모습이다.
단풍 숲속의 나는 고독을 느낄 겨를이 없다. 다만 쪼그리고 앉은, 근육이 퇴화된 다리와 무릎 관절이 아파 올 뿐이다. 앉았다 일어서면서 저절로 ‘아이고’라는 가벼운 비명이 나도 몰래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나온다. 이 비명은 순간의 무릎 관절의 뻐근함과 아픔을 상쇄해주는 대리작용을 하고 있다.
프로듀서로서 방송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구상력을 발휘하지만, 그림은 나 자신만 만족시키면 되는 편이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두고 결과물로 만족하면 된다. 나는 그동안 개인적 만족을 추구하는 아마추어의 창작활동과 공익을 우선하는 메시지 가공물의 제작 사이에서 생활했나 보다.
그런데 사진을 통해본 외연적인 나의 모습이 아마 쓸쓸하게 보였나 보다. 혹시 쓸쓸한 가을 이미지가 후배에게 미리 학습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가족과 오래전부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일까. 혼자 울란바타르 생활을 하는 내 모습을 추측해서 그런 것일까.
그러고 보니, 황홀한 단풍이 물든 이 가을이 쓸쓸한 것 같다. 몽골의 가을도 어쩔 수 없이 절대고독이 서린 가을인 모양이다. 가을은 인간 내면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하는 계절임이 틀림없다. 내가 그린 그림 속에서 내가 보인다. 나의 모든 기억과 영혼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그림을 후다닥 끝내고 돌아갈 시점은 가을 오후가 시작된 정오를 조금 넘어선 때였다. 몽골 고원의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생현장에서 세밀한 점과 선을 표현할 정도로 늑장을 부릴 새가 없다. 웬만큼 그리고선 현장을 벗어나는 게 추위를 피하는 길이다. 몽골의 가을은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짧다. 곧 눈이 내려 이 고원을 덮고 사람들의 일상을 움츠리게 할 것이다.
현장에서 느끼는 세세한 감성의 기록은 내 가슴속 깊이 새기면 될 것이다. 대신 그림 작품이 내 영혼의 흔적으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다.
Eco-Times 금웅명 고문producerkum@daum.net [MNB (몽골 국영방송국) 방송 자문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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