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투(Tartu)는 에스토니아에서 수도 탈린에 이어 두 번 째로 큰 도시다. 필자는 지난 1월 말 대략 10년 만에 현지 조 사를 목적으로 2박 3일 동안 타르투를 다시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이에 타르투도 마지막 방문 했을 때와 달리 상당히 현대적이고 화려한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인구 10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장사가 될까 싶을 정도로 번듯한 대형 쇼핑몰, 수도 탈린에 못지않은 세련된 모습의 호텔들에서 전 세계 방문객들의 입맛을 홀리는 근사한 레스토랑들에 이르기까지 타르투는 국제적 수준의 도시로 발돋 움하려 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타르투는 2024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되어 연초부터 다채로운 국제행사를 선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타르투는 이미 2011년에 탈린과 문화수도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다. 당시는 예상대로 문화수도 행사를 개최할 기회가 탈린에 돌아갔지만, 타르투는 그 뒤로 상당 기간 벼르고 별러서 마침내 이 행사를 개최할 기회를 잡았다.
유럽문화수 도는 유럽연합(EU)이 회원국 도시를 매년 선정하여 1년간 다 양한 활동 지원을 통해 해당 도시를 집중적으로 알릴 수 있 는 공식 자격을 부여해 주는 제도다.
1983년 그리스 문화부 장관의 제청으로 1985년 그리스 아테네가 유럽문화수도로 처 음 지정된 이후 매년 2~3개 도시가 선정된다. 올해는 오스트 리아의 바트이슐(Bad Ischl), 노르웨이의 보되(Bodø)와 함께 타르투가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되었다.
한편,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타르투는 유서 깊은 대학이 있고 인구가 적은 조용한 도시로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잘 모르는 이유도 있겠지만 타르투에는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특히, 타르투는 작고 아담하기만 한 학문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조용한 혁명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에스토니아 현대사를 대변하는 ‘노래하는 혁명’은 수도 탈린에서 일어났고 여전히 그곳에서 ‘에스토니아다움’의 상징인 노래대전이 5년에 한 번 열린다.
또 1989년 8월 23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시작하여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지나 탈린까지 장장 675km에 이르는 거리를 자그마치 20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만든 인간 띠(‘발트의 길’)도 타르투를 지나치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날 때 타르투는 왠지 그냥 잠잠하게 있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3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 대합창 장관을 연출하는 에스토니아 노래대전은 타르투에서 기원했다.
1863년 남부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민 족정신을 깨우치고자 했던 곳이 바로 타르투였던 것이다. 에스토니아 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요한 볼데마르 얀센이 조직한 첫 번째 행사에는 822명이 참가했고 1896년 네 번째 행 사부터는 탈린으로 옮겨 행사가 진행되었다.
타르투는 에마여기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관류한다. 이 강 은 에스토니아 내륙에서 발원하여 러시아와 국경을 형성하는 페이푸스호로 흘러나간다. 이름 속에 ‘어머니’를 뜻하는 에마(Ema)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에마여기강은 남부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성스럽고 자애로운 강이었으며 이 강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도 많이 창조되었다.
그중에서 대표작 은 리디아 코이둘라의 시집 '에마여기강의 나이팅게일'이다. 리디아 코이둘라는 요한 볼데마르 얀센의 딸로, 특히 「나의 조국은 나의 기쁨」이란 시를 써서 에스토니아인들의 심금을 울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시는 내용도 단순하고 은유 등 특 별한 비유법을 사용하지 않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 시가 값진 이유는 에스토니아 노래대전의 피날레 곡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에 걸쳐 강대국들의 지배와 천대를 받았던 에스토니아인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은 이 노래를 통해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주독립 열망을 불태웠다. 특히 소련 시절 에스토니아 국가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이 노래만큼은 예외적으로 자유롭게 부를 수 있었다. 소련 사람들은 이 노래에 나오는 ‘나의 조국’을 바로 소련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타르투는 에스토니아 ‘최초’의 기록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타르투는 무엇보다도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1030년경 키예프 루시(키이우 루스)의 야로슬라프 (1세) 무드리 대공후가 발트 지역에 무역과 상업, 군사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타르투를 정벌하여 도시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탈린이 역사에 등장한 때가 1219년이므로 타르투는 탈린보다 무려 200년이나 더 앞서 건설된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타르투는 20세기 직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어로는 유리예프로 불렸고 독일어와 스웨덴어, 폴란드어로는 도르파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유리예프는 이곳을 세운 야로슬라프 무드리의 세례명인 ‘유리’에서 유래했다. 한편, 도르파트라는 옛 이름은 오늘날 타르투 중심가의 현대적인 호텔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최초’ 기록은 타르투대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에스토니아 전역이 스웨덴 지배 아래 있었던 1632년 당시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 2세가 설립한 북유럽 전체에서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왜 대학이 수도 탈린이 아닌 타르투에 세워졌는지 의아해하는사람이 적지 않다. 사실 타르투대학교의 전신은 에스토니아 남부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의 지배를 받던 1583년 폴란 드 왕 스테판 바토리가 세운 예수회 학교였다.
이 시기에 사 용된 폴란드 국기가 여전히 타르투시 깃발로 쓰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발트 3국 농노들이 타르투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아 들어가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민족운동을 이끄는 선구자로 거듭났다. 타르투 대학교는 현대에 와서 화학과 물리학, 민속학, 기호학 등 여 러 학문 분야에서 북유럽 최고의 학술적 성과를 내놓으며 명성을 떨쳤다.
에스토니아 최초의 극단과 국립극장도 타르투에 설립됐을 정도로 이곳은 에스토니아 예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게다가 타르투는 1909년 4월 14일 이곳에 처음 세워졌고 2016 년 최신식 미래형 건축물로 재탄생한 에스토니아 국립박물관 도 소재하고 있어 에스토니아 민속문화의 원형이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 소련이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전쟁 종식에 동의하는 평화협정도 타르투에서 조인 되었다. 비록 오래 가지는 못했어도 에스토니아 독립의 초석이 된 중대한 순간이 타르투에서 나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 최근 타르투는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유명한 에스토니아에서 미래형 최첨단 기술·경영 혁신을 선도할 중심지로 발돋움하려는 강력한 의지와 구체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는 4년 전인 2020년 1월 말 시 중심부의 에마여기강 기슭에 성대하게 문을 연 타르투대학교 델타센터의 안팎 풍경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최신식 건물로 이뤄진 델타센터는 구도심의 고색창연한 이미지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타르투의 현대적 지향성을 보여주는 최신 사례다.
타르투 중심부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델타센터는 타르투대학교 컴퓨터공학연구소가 이전해온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술경영 혁신을 추구하는 타르투의 새로운 연구 중심지로서 에스토니아의 미래 성장을 주도할 인재 요람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서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발트연구센터 책임연구원]
* 2024년 1월 말 2월 초 진행된 한국외국어대학교 EU연구소 발트 3국 연구사업단의 에스토니아 현지 조사 성과에 관한 칼럼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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