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년 전 마산에 세워진 러시아 영사관 발자취를 찾아서-러시아 부영사관 마산포에 개설 후 부산으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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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포 주재 부영사로 부임한 세르게이 소코프는 1900년 9월 14일(구력 1일) 일본인 오카모토 이자미와 마산포에 러시아 영사관 건물을 건축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오카모토는 석조 기단의 2층짜리 벽돌 건물인 본관, 얇은 널빤지로 지붕을 마감한 주방과 하인들을 위한 공간을 가진 일본식 1층 건물, 그리고 통역사를 위한 한옥 건물 등을 함께 건축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카모토가 수령한 시공비용은 총 8,030엔(약 8,000루블)이었는데, 벽돌을 제외한 모든 건축 자재는 최상급을 쓰기로 했고, 영사관 건물 건축과 주방 안 난로 제작에 필요한 벽돌은 러시아 측이 조달하는 조건이었다. 부영사 세르게이 소코프가 1902년 1월 3일에 작성한 업무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작업은 계약서 내용대로 실행됐다
1900년 12월 23일 러시아 제국 국가 회의 총회는 외교부 의 보고서를 검토한 후 마산포 주재 부영사를 임명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그 후 1902년 1월 9일 외교부 지시에 따라 뭄바이 총영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게오르기 코자코프가 마산포 부영사로 임명되었다.
마산포에 주재했던 러시아 영사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항 이후 첫 몇 년 동안 마산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달했다. 마산포와 부산을 연결하는 전신선이 1901년에 개통했고, 마산과 진주를 잇는 전신선도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같은 해에 세관 건물이 신축됐고, 일본의 우체국 건물도 착공됐다. 당시 마산포에는 베흐틴과 코즐로바가 운영하던 러시아 호텔, 포도주와 식료품 판매 가게, 도브잔스키 벽돌공장 등 러시아 기업들도 진출해 있었다.
1901년 말경 외국인 거류지 주민의 숫자는 조선인 거주 지역에 살던 일본인과 중국인을 포함해 317명에 달했다. 국적별로는 일본인 261명, 중국인 28명, 러시아인 24명, 세관 직원과 가족 등 독일인 3명, 프랑스인 선교사 1명 등이었다.
그런데 1902년에 접어들면서, 마산포가 조선 남해안에 있는 외국인 거주 지역의 중심지로서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다는 평가와 보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계지 내 건물 신축이 중단됐고, 그곳으로 이주했던 일본 상인들은 조선인 거주 지역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보고서에서 게오르기 코자코프는 “러시아 기업들이 손해를 보면서 장사를 했고, 도브잔스키 벽돌공장은 생산을 중단했으며, 공장 주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식료품점 문을 닫고 떠났다. 나머지 러시아인들도 마산포에서 수익을 올리기는커녕 대부분 자본금마저 잃은 상태로 뿔뿔이 흩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 외교관들은 빠른 속도로 부상하는 부산 때문에 외국인들이 마산포를 떠났다고 판단했다. 이런 배경에서 1903년 1월, 주한 러시아 공사관은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관의 부산 이전과 영사관 건물 신축을 위한 용지 매입 필요성 등에 관한 제안서를 외교부 본부에 전달했다.
애초 마산포에 영사관을 개설했던 주된 이유가 그곳에 해양부의 조계지를 획득하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조선 남부의 마산포에 더 남아 있을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이 당시 러시아 외교관들의 판단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마산포 부영사관은 조선의 남부 지역을 연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가 있는 정도였는데, 부산이 조선 남부의 상업과 정치 활동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어서 마산포의 중요성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1903년 6월 7일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마산포에서 부산으로 부영사관을 이전하는 것을 허가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그해 가을,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 게오르기 코자코프는 미국인 얼빈으로부터 영사관 신축 용지를 매입했다. 영사관 용지는 항구에서 멀지 않은 우뚝 솟은 산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었는데, 거기에 서면 부산만과 함께 멀리 대양의 풍경이 펼쳐졌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경부선 철도역과 연락선이 정박하는 부두가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세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적혀 있다. 이때 매입한 용지의 전체 면적은 28,197제곱미터에 달했다. 이곳에는 사무실, 부영사 집무실, 응접실, 식당, 침실과 화장실 세 칸, 간이식당과 창고 용도의 기와 또는 석판 지붕의 1층짜리 벽돌 건물, 그리고 통역사를 위 한 작은 한옥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1923년 부영사관이 문을 닫을 당시에, 영사관 건축을 위한 용지는 완전히 준비된 상태였고, 용지 둘레를 따라 돌로 된 옹벽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영사관 건물 자체는 결국 세워지지 못했다. 그리고 1935년 부산에 있던 러시아 소유의 토지는 모두 팔렸다.
현재 남아 있는 서류들을 바탕으로 부산에 근무했던 러시아 영사들의 명단과 업무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03년부터 마산포 주재 부영사 게오르기 코자코프 가 부산의 업무를 담당했는데, 1906년 부산 주재 러시아 제국 부영사로 표도르 바실리예프가 임명됐고, 1915년에는 그의 뒤 를 이어 부영사 비탈리 스코로두모프가 그 직책을 맡게 되었다. 표도르 바실리예프에 관한 정보는 제법 많이 남아 있다.
바실리예프는 동양학 전문가로,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동양어학부 중국·만주·몽골 전공 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조선 외에 일본과 중국에서도 근무했고, 러시아 제국과 다른 여러 나라가 수여하는 상도 여러 차례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외교관들이 남긴 보고서를 보면, 당시에 이미 러시아 극동과 조선 남부 지역 사이의 관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부산항을 통한 수출 규모 면에서는 아시아 지역의 러시아가 일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수출된 물품들은 쌀, 소금, 생선과 건어물, 담배와 다양한 약재 등이었다. 한편, 러시아에서 부산으로 수입된 품목은 연어 등의 생선과 미역, 비료 등이 대부분이었다. 1916년에는 부산에 ‘동아시아무역연구회’가 조직되는 일도 있었다.
러시아와의 무역 가능성을 현지에서 직접 살펴볼 목적으로 1916년 8월 연구회 소속 회원 5명이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향해 떠났다.
구한말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관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마산 월포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마산시에서는 학교 정문 인근에 러시아 영사관이 있던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 부산 주재 러시아 부영사관 건물 신축을 위해 오래전에 구매했던 용지와 건물의 실제 위치는 아직껏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120여 년 전 러시아가 조선 남부에 개설한 영사관에 관해 서는 여러 질문과 연구과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 질문들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자료가 한국의 문서보관소 어딘가에 소장되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러시아 영사관 개설에 관한 오래전의 역사적 사실들은 올해로 140주년을 맞은 한·러 관계사를 되돌아보는 데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 각한다.
생태환경뉴스 Eco-Times / 홈페이지: eenews.kr
옥사나 두드니크 (부산 주재 러시아 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