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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웅명의 문화기행 / 몽골단상 (8)] - 37시간의 열차 여행, 울란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까지-:생태환경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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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웅명의 문화기행 / 몽골단상 (8)] - 37시간의 열차 여행, 울란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까지-

Eco-Times | 기사입력 2023/08/01 [09:11]

[금웅명의 문화기행 / 몽골단상 (8)] - 37시간의 열차 여행, 울란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까지-

Eco-Times | 입력 : 2023/08/01 [09:11]

 

 

▲ 칭기스칸 광장 남쪽 방향, 바로 건너 블루스카이(Blue Sky) 빌딩이 울란바타르의 상징적건물이고 저 멀리 복드항(Bogdkhan) 산이 앉아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떠나는 시각이 저녁 8시 45분이다. 아직 기차 역두는 대낮이다. 위도가 높은 울란바타르에서는, 여름철 시각으로 저녁이나 밤시간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여름의 태양이 오래도록 내리쬐기 때문이다.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이 몽골 울란바타르이다.

 

여름휴가를 맞아 아내와 나는 일찌감치 짐을 챙겨 두무르 잠 보달(기차역, 몽골어)로 와서, 3번 플랫폼에 서 있는 열차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모처럼 아내를 만나 함께하는 여행이라 나는 사전에 기차표를 예약했고, 울란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국제 열차를 타기 위해서 오늘은 서둘러 울란바타르 역으로 왔다.

 

칭길테(Chingiltei)의 답답한 아파트 숙소를 벗어나 시베리아 벌판이 어떤 풍경을 연출할지 궁금했다. 동서로, 아시아 대륙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지 아닌가.

 

한편 몽골, 시베리아 횡단열차 ‘37시간의 주행’이 가벼운 긴장감을 갖게 만든다. 기차 탑승 37시간이면 처음 경험하는 일로 2박 3일, 즉 기차 안에서 이틀 밤을 자야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시간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열차가 달리는 절대 시간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걸리는 시간이다.

 

이전부터,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한번 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역두에 러시아로 가는 몽골인 여행객을 비롯해 스페인에서 온 여행객 일행이 서성거린다. 8월 13일 한여름 저녁 역두의 역광 풍경을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탑승을 기다리는 실루엣의 러시아 여인의 모습이 마치 영화 장면같이 다가온다.

 

▲ 이르쿠츠크 행 국제 열차(울란바타르 역 플랫폼)

 

같은 4인실 쿠페 안에는 말레이지아 친구 라이(Rai)와 러시아 아가씨 안나(Anna)가 탔다. 쿠페(Coupe)는 본디 좁은 공간의 4인승 자동차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몽골에서는 기차 객실을 쿠페라고 부르는 것 같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컴파트먼트(Compartment)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 객실 열차를 1990년대 초, 동구 취재 때 불가리아 소피아(Sofia)에서 구 유고 연방이었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Beograd)까지 국제 열차를 탄 적이 있어 객실 열차는 그리 낯설지가 않다.

 

엔지니어인 라이(Rai)는 여름휴가를 이용해 이르쿠츠크를 거쳐, 바이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그를 돌아보고 귀국할 예정이다. 몽골 국제대학교 (MIU, Mongolian International University) 출신의 안나(Anna)는 시베리아 동쪽 끝 사할린에서 영어 선생을 하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이르쿠츠크를 거쳐 북쪽으로 한참 더 가야 하는 고향집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2박 3일의 여행에서 만난 일행은 같은 목적지를 가진 여행 동반자가 되었다.

 

라이는 배낭 한 개를 지닌 몸이 가벼운 여행객이고 안나는 모처럼 고향 방문길이라 그런지, 큰 가방 짐이 두 개나 되나 보다. 울란바타르를 출발하기 전에 왠 몽골 사내가 내가 앉은 좌석 아래 빈칸에 짐을 넣고 있었다. 나에게 사전 양해도 없이 마구 짐을 쑤셔 넣는 그를 이상하게 여겨 그를 스머글러(밀수꾼)인가, 넘겨짚기도 했다. 나중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쯤, 안나가 그녀의 짐이라고 해서 오해가 풀린다.

 

기차가 국경역 수흐바타르(Sukhubataar)로 북상하면서, 이들과는 나이를 불문하고, 국경을 넘어서면서 곧 친해진다. 시니어인 나와 아내, 20대인 이들과는 거리감이 없다. 같은 여정에서 만나면 이내 친해지는 게 여행길의 보너스이다.

 

스스럼없이 개인적인 이야길 나누고 서로 여정을 알려준다. 서로의 신상을 소개함은 물론 여행 목적도 금방 공개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길 한다.

 

울란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까지의 쿠페 공간은 우릴 함께 묶는 소규모의 지구촌 마당이 되고 있다. 쿠페 공간은 한반도와 미국, 동남아시아, 러시아대륙이 함께 이어진 세계 마을이 되었다. 색다른 열차의 공간 체험이다.

 

▲ 몽골 횡단 열차

 

 

몽골 횡단 열차는 머리를 북으로 향해 달린다. 도시를 벗어나 달리는 녹색의 벌판과 구릉 지대는 이제 나에게 별로 색다른 감흥을 일으키진 않는다. 몽골초원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냥 열차는 육중한 레일 위로 바퀴의 굴림소리를 내며 덜커덩 덜커덩, 달리기를 계속할 뿐이다.

 

그런데 몽골 국경으로 가까이 오면서 집들의 모습이 게르(Gher, 몽골 전통 이동 집)가 보이지 않고 지붕이 가파른 나무집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는 증거이다. 들판의 풀을 뜯는 다소 흰 빛을 띤 소들이 띄엄띄엄 보인다. 누런 소의 모습이 아니다. 시베리아 특유의 종자인가 싶다. 푸른 관목들이 톨(Tuul) 강을 따라 늘어선 것을 보니, 아직은 본격적인 시베리아의 풍경과는 다른 것 같다.

 

열차 칸의 여승무원은 우리들의 여권과 기차표를 거두어 가고, 침구를 가져다주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말없이 일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믿음직한 여성상을 보는 듯하다. 사회주의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인 듯, 기차를 움직이는 이는 남성인데 원활한 기차운행을 돕는 이는 여성이다.

 

칸 마다 배치된 여승무원들의 활기찬 행동은 원활한 열차 운행을 돕고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서다. 에너제틱한 전문직 몽골 여성들이다. 어디서나 이들은 씩씩하게 일하고 있다.

 

침묵하는 시베리아 대륙의 자연을 보며 하염없이 달려가다 보면 저절로 말이 없어지는 것일까. 이들은 말수가 적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다. 오늘따라 승객의 수도 적다. 여행 성수기의 끝물이라 그런지, 빈칸 쿠페가 있을 정도로 어쩌면 달리는 열차가 한가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튿날 814일 아침 8시경, 열차는 울란바타르에서 북쪽으로 밤새 달려 몽골 국경 역인 수흐바타르(Sukhubaatar) 역에 도착한다.

 

▲ 몽골 들판을 달리던 옛 기차(수흐바타르 역 앞)

 

▲ 몽골 사이한(Saikhan) 언덕, 몽골-러시아 국경의 몽골 쪽에 위치한다. (셀렝게 아이막 수흐바타르 시 인근) 두 인물은 1920년 몽골인민당을 결성해 무장투쟁으로 중국으로부터 몽골 독립에 헌신한 수흐바타르와 초이발산이 아닌가, 여겨진다. 13세기, 이 언덕에서 징기스칸은 메르키드 부족을 물리치고 부족장의 딸인 두 번째 부인 훌란(Khuran)을 맞아들인다.

 

 

아침이라, 승객들은 역두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서 돈을 내고 양치질과 얼굴을 씻는다. 어떤 승객들은 열차에서 내려 역 가까운 마을 상점에 가서 장시간 여행에 먹을 간식과 마실 음료 등을 사 온다. 열차는 입환 작업을 한다.

 

우리가 탄 열차는 그대로 있고 다른 칸들이 와서 붙는다. 1m 52cm 광궤 폭으로 달리는 몽골, 시베리아 열차의 레일에는 문제점이 없는 대신에, 객실 열차를 더 추가하는 모양이다. 한참을 기다려 승객들은 출국 수속을 밟는다. 출입국 관리가 쿠페를 찾아와 승객들의 몽골 출입국 비자에 도장을 찍는다. 몽골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절차이다. 열차는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러시아를 향해 달린다.

 

▲ 러시아 국경 역 플랫폼, 여 승무원이 탑승객들을 지켜 보고 있다

 

이번에는 러시아 국경 역에 도착해서 출입국 관리들로부터 심사를 받는다. 관리들이 일일이 쿠페를 통과하며 승객들의 여권을 보며 확인한다. 심사하는 출입국 관리 여성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여권을 보며 일행에게 스탠드 업, 싯 다운하면서 본인 여부를 확인하며 명령조로 다그친다. 거기에 플리즈(please)’란 말 한마디만 더해도 친절하게 보일 터인데...

 

출입국 심사관이 국경 통과 승객을 통과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위압적으로 심사하고 있는 현장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관리, 통제 분위기가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인가. 노란 금발에 푸른 유니폼을 입은 러시아 여성 관리들은 마치 첩보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인물 같다. 눈초리가 매섭기까지 하다. 일행은 위축된 채 순서를 기다릴 뿐이다.

 

한 관리는 마약 탐지견까지 데리고 열차에 올라 열차 복도를 지나간다. 국경도시인만큼 국제 열차의 긴장감을 주는 분위기가 한껏 풍긴다. 국경을 통과한 기차는 밤 속으로 빠져든다. 한참을 달렸을까 열차는 저녁 730 분 경에 러시아 울란우데(Ulan Ude) 역에 도착한다. 2011년 북한의 김정일이 전용 열차를 타고 와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 곳이다.

 

부리야트(Buryat) 공화국의 중심도시인 이곳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라마 불교 사원이 있다. 800여 년 전 몽골제국 시기에 이곳은 몽골 땅이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몽골인의 모습을 지닌 러시아 인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이곳 부리야트 인은 한국인의 DNA와 유사점이 많아 바이칼 부근의 이들이 한민족의 시원 민족이 아닌가, 하는 학설이 있을 정도이다.

 

▲ 코리 부리야트(Kori Buryat) 족의 가족, 한국인의 원형을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다. ‘코리’라는 부족 이름이 ‘고구려, 고려, 코리아(Korea)’의 뿌리 이름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안나는 친구를 만나 물건을 전해 줄 일이 있어서 울란 우데(Ulan Ude) 역두에 내린다. 한동안 서 있는 기차가 고맙다. 나는 이 순간을 이용해 참았던 흡연 욕구를 해소한다. 컴컴한 역두에 오가는 이들이 뜸해지고 저녁 8시가 되자, 열차는 레일 위를, 또 밤을 헤치고 달린다.

 

이제는 컴컴한 사위가 우릴 에워싸고 있다. 어느새 일행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하룻밤이 흘러가고 있다. 이제 일행에게 쿠페 칸은 무덤덤한 안방, 거실 같은 공간이 돼 버렸다.

 

이튿날 아침 흔들리는 침대(낮엔 좌석)에서 잠을 깨니,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어느 역에 도착해 장시간 서 있다. 밤사이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지나온 풍경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쉽다. 낮 동안 간간이 나타난 자작나무는 시베리아의 상징물처럼 보였는데, 혹시 자작나무 숲의 바다를 지나온 것은 아닐까.

 

안나가 역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할 수 있다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안나가 우리 일행의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역 화장실을 지키는 여직원에게 사용료 20루블을 지불하고 지난밤의 찌꺼기를 씻어 낸다. 엊저녁에 아내와 나는 준비해간 햇반, 볶음 고추장과 양념 김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 외에도 준비해간 견과류를 먹은 터라 입안이 텁텁했는데 화장실 수도꼭지 물로 입안을 헹구고 세수를 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열차칸 화장실의 세면대는 작아서 손을 씻을 수 있는 정도의 편의만 제공하는 수준이다.

 

시간적으로는 지체가 되지만, 결과적으로 얼마나 고마운 배려인가. 열차가 러시아의 한 역에 오래 머문 덕에 승객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재정비를 할 수가 있다. 물론 일부 승객은 역 앞 마실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온다. 이 마을의 한여름 낮 풍경은 널따란 시골 풍경답게 정겹게 다가온다. 시베리아의 한여름은 뜨겁기만 하다.

 

어차피 몽골과 러시아 국경 역에서 열 시간가량 소비했으니, 이제 안달할 필요가 없다. 느긋해져야 한다. 내일 아침 7시경이면 이르쿠츠크(Irkutsk) 역에 도착할 것이다. 열차는 또 달린다. 들판을 지나고 마을이 가까이 오면 판자로 지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나무 울타리도 보인다. 관목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고 제법 큰 자작나무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 바이칼(Baikal) 호안의 자작나무 숲

 

▲ 바이칼 남단의 호안마을 리스트비앙카(Listvyanka)짙푸른 호수와 주변은 온통 자작나무 군락이 자라는 숲이다.

 

▲ 자작나무와 시베리아 야생화

 

마을에는 5층 아파트 건물도 보이고 공장 모습들도 보인다. 석탄,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시베리아의 풍경이다. 시베리아는 산림자원을 비롯해 천연 광물자원이 많이 매장돼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랄산맥에서 태평양까지 1,310만 평방km에 해당하는 광활한 이 지역은 러시아 전체 영토의 77%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묻혀 있는 자원을 고려하면 이곳은 미래의 대륙이다. 부존자원 면에서는 러시아는 부자 나라이다.

 

▲ 러시아 울란우데(Ulan Ude) 역두의 밤 풍경

 

열차는 시원한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연신 힘겨운 질주를 계속한다. 스물 일곱 살인 라이는 중국계 말레이인으로 풀 네임은 라이 콕순( 國順)이다. 그는 기계 엔지니어로 성격이 명랑한 청년이다.

 

명문대학인 몽골 국제대학교(MIU, Mongolian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영어를 전공한 스물두 살 안나 역시 유쾌한 성격을 가져 이 둘은 죽이 잘 맞는다. 나는 울란바타르를 출발할 때 안나가 미국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영어가 유창해, 역시 교육을 제대로 받은 러시아 엘리트 여성임을 확인했다.

 

라이가 바이칼을 갈 예정인데 이르쿠츠크에서 20시간을 머물 안나가 가이드 역할을 할 모양이다. 라이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훌륭한 러시아어 통역 겸 가이드를 만난 셈이다. 젊은 남녀의 만남, 역시 젊음이 좋다. 즉석에서 만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안나는 뜻밖의 바이칼 방문 기회를 얻어 기뻐하는 눈치다

 

▲ 바이칼 호수



복도에 붙은 열차 운행표를 보니, 울란바타르(Ulanbaatar)에서 이르쿠츠크(Irkutsk)까지 간이역 포함해, 전부 50여 개의 역을 통과한다. 큰 도시의 역 몇 군데를 빼고는 1분 정차가 대부분이다. 간이역은 잠간 섰다가 통과하고 제법 큰 역은 2, 30분씩 머물고 떠난다. 러시아 승무원 여성도 매 역마다 서면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그녀는 흡연 욕구 때문에 복도를 오가며 서성이는 나를 아마 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무려 50여 개의 역을 통과하며 정차하고, 국경 역에서 열 시간 이상을 머물렀으니 정차 시간을 빼면 기차의 질주 시간은 스무 시간 남짓하다. 1,500 km가량의 거리를 37시간이나 걸려 달리니, 과연 육중한 대륙의 열차답다.

 

이제 흔들리는 쿠페의 진동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바퀴의 일정한 진동과 그 소리에 만성이 되었다. 또 하루가 가고 어둠이 찾아든다. 자는 것이 시간을 앞당기는 일이다. 나와 아내는 아래 좌석에서 잠을 청하고, 라이와 안나는 윗 좌석 정해진 공간에서 하루를 버틴 피곤한 몸을 눕힌다. 일행은 시베리아의 밤하늘 아래 단꿈 속으로 빠져 든다.

 

 

▲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앙가라(Angara) 강

 

▲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왼쪽부터 안나, 라이, 필자)

 

아침 녘, 잠에서 깨 창밖을 보니 희뿌연 풍경이 나타난다. 곧이어 앙가라(Angara)강과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바이칼(Baikal) 호수에서 유일하게 빠져나가 북극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드디어 열차가 이르쿠츠크(Irkutsk)역에 도착한다. 815일 광복절 아침 7시 직전이다.

 

나는 이 순간을 기념하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본다. 러시아는 한반도 분단의 장본인이었다. 연합군으로 2차 대전을 마무리한 미소 점령군이 한반도에 진입했고 그 결과로 군사 점령 경계선인 38선이 획정되었다. 소련군은 유럽 전선에서, 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운 전리품으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장악했던 한반도에 분단선을 긋고 이곳에 진주했다.

 

그 소련에, 지금의 러시아 땅에 내가 발을 딛고 선 것이다. 광복 70, 분단 70년은 우리 민족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간직한 한 맺힌 기간이다. 한 참 거슬러 올라가면 1800년대 조선조부터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배고픔을 못 이겨 식솔을 이끌고 극동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를 해, 이곳에 농토를 일구고 살았다.

 

▲ 1850년대 조선 마실의 단란한 가족, 이 집은 먹고 살 곡식이 있어 보인다.1860 청 - 러 간 베이징 조약이 맺어지면서 러시아가 간도의 일부였던 연해주를 차지한다.이 시기 훨씬 이전 조선은 삼정의 문란 등으로, 기근과 땅이 없는 농민들은 식솔을 이끌고 삶의 터전을 찾아 농토 확보의 가능성이 있는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1937년 그들이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한다는 혐의로 머나먼 중앙아시아 사막불모지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때 그들이 추위 속에 타고 왔던 한 맺힌 길이 바로 내가 타고 지나온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닌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 1937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이들은 황무지에서 토굴과 움집을 짓고 고난의 삶을 이어갔다. 관개시설을 설치하고 벼농사를 시작해 삶의 형태를 유지한 고려인들은 지금 카자흐스탄에 그 후손들 약 10만 명이 살고 있다.

 

▲ 우슈토베 고려인 최초의 정착지에 지금은 선조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사진 출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이야기)

 

▲ 고려인 무용단의 무용수, 이제 그 후손들, 고려인 5세들이 명맥을 잇고 있다.(사진 출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이야기)

 

37시간의 기차 여행, 1937년의 불행한 일. 왠지 숫자가 주는 동일성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37이란 숫자가 공교롭다. 광복절 아침, 러시아 땅 이르쿠츠크역에서 느끼는 감회가 나에겐 가슴 뜨겁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 1896년 출생의 사회주의 운동가 김만겸의 증손자 아르튜노프 다비드김만겸은 1910년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초등학교를 운영했다. 3.1 운동 뒤 신한촌에 조직된 독립단의 부단장을 지낸 그는 1920년 초 상해에서 이동휘(임정 초대 국무총리)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조직, 여운형과 더불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당시 이들의 꿈은 오직 ‘조선 독립’이었다.



Eco-Times 금웅명 고문producerkum@daum.net

[MNB (몽골 국영방송국) 방송 자문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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