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4시 화성시청 1층 정문 현관 앞에서 근대음악전시관 설립 반대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날 회견은 광복회 화성시지회 .민족문제 연구소 .화성의료사업회 등 에서 주최했다. 자칭 시민모임 발족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모임은 10명에 불과 했다.
이들의 주장은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 건립계획중인 근대음악전시관은 실제로는 홍난파 기념관이고 친일행적이 있는 홍난파 기념관 설립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때아닌 친일 논란이 화성시청 앞에서 이슈로 등장했다.
다른 한 편에선 근대음악전시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달라며 건립 찬성을 지지하는 시민 50여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이들의 회견을 지켜보았다.
건립 찬성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회견이 시작된지 2~3십분 후 모두 해산했다. 시민들의 무관심속에 10여 명의 기자들만 덩그라니 지켜보는 가운데 주최측의 장황한 주장만 약 1시간 반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다.
[기자 단상]
이날 회견을 보면서 기자는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해방 된 지 71년이 지났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야 하는 걸까. 홍난파를 이렇게 친일파로 몰아치는게 올바른 건가. 이념과 정치의 편가르기가 여기서도 다시 작동하고 있지 않은건가.
'고향의 봄' 같은 주옥같은 노래 작곡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한 홍난파,
특히 그가 작곡한 '봉선화'는 그 음조와 가사가 당시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의 현실과 수난 당한 겨레의 비참한 처지와 비슷하다고 해서 반일 애국사상을 심어주는데 기여 했다고 평가 받는 노래다.
또한 2019년 광복회 서초구지회 주관으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는 홍난파 작곡 '봉선화'와 고향의 봄 ' 을 출연진과 관객이 모두 함께 일어서서 제창하기도했다.
2023년 광복회와 2019년 광복회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것도 이해 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홍난파는 1937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72일동안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일제의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일제에 협조할 수 있다는 각서를 쓰고 석방됐다.
협조각서는 홍난파에게는 삶을 이어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미국유학에서 습득한 신사조의 음악으로 그 자신의 음악세계 ,조선의 음악발전을 펼쳐 나갈 생각만으로 가득했으리라. 살아남아야 할 이유와 의지가 너무나 강했던 것이다
나치 하에서 활동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카라얀이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 스탈린폭정 하에서 활동했던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가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협력했다고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의 훌륭한 음악활동, 위대한예술적 업적에 찬사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한 시대의 질곡 속에서 다 함께 생존을 위해 몸부림 쳤던 인간군상 ,그 중에서 예술분야에서 뛰어났던 인물들을 강제 동원시킨 일제의 소동 , 격류에 휘말렸던 인물들...
이런 홍난파를 과연 일제의 앞잡이였노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
기자는 '너희가 그 상황이 되면 할복자살이라도 할 용기가 있느냐 ?' 라고 강하게 반문하고 싶어졌다.
홍난파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4년 동안을 투병하다가 1941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홍난파 그 위대한 음악가는 시대의 희생자다.
Eco-Times 박래양 기자 lypark97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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